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흘러간 물로는 물레방아를 돌릴 수 없다.
  • 염민호 편집국장
  • 승인 2019.04.05 11:2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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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유난히 귀가 컸던 모양이었다.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의 두런두런 나누던 말씀이 선명하게 귓바퀴를 타고 들어와 뇌리에 박히면 나름대로 요약하고 정리하며 자신의 논리를 세우는 자양분이 됐다. 얻어 들은 이야기 가운데서 부모님 세대가 걸어온 삶의 고단한 이야기는 때로 어린 가슴에 아픔으로 남았고 슬픔이었다.

‘전해들은 말’은 직접 경험하지 않은 간접 경험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예전 학창시절에 은사님 한 분은 “선생이란 5분 먼저 배우고 익혀 5분 후에 가르친다는 뜻”이라고 하셨다. 요즘 영상매체나 SNS상에서 전문가임을 자처하며 수많은 가르침을 전하는 분들의 강의를 들어보면 지식의 보편화가 상당 수준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든다. 고개를 조금만 옆으로 돌려 살펴보면 또 다른 선생이 같은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고만고만한 말의 성찬(盛饌)이 차려지는 것이 이 시대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사실 말을 듣는다거나 전한다는 것은 모두 피곤한 일이다. 깊이 없는 세상의 온갖 잡다한 이야기가 뇌리에서 맴돌고 있으면 쓸데없이 에너지가 소모된다. 마치 컴퓨터 전원스위치를 끄지 않은 것과도 같이 잡념이라는 소음이 끊이질 않는다.

엊그제 ‘4월3일’을 보내면서 전해 들었던 용어 ‘죽창’ ‘몽둥이’ ‘학살’ 등의 낱말이 연상됐다. 어느 분이라고 굳이 에둘러 말할 필요도 없겠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대통령께서 ‘빨갱이’라는 말이 일제의 잔재물이라고 말했던 그 내용도 함께 떠올랐다.

몇 해 전 어느 고등학교 여학생이 유튜브(Youtube)에 올렸던 영상의 내용이 기억을 헤집고 올라왔다. 본인의 말이 어느 매체의 카메라에 담겨 방송에 노출된 것이 매우 자랑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후폭풍이 만만치 않았다. 그 영상 속 여학생의 입에서 현시대의 부조리를 타개하는 방법은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 밖에 없다”는 선언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었다. 파장이 커지자 그 부모가 나서서 해명을 하고 그 영상은 며칠 후 삭제됐다.

사실 ‘빨갱이’라는 용어가 안겨주는 공포가 있다. ‘빨갱이’라는 용어 속에서는 ‘피’가 배어나온다.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폴 포트(Pol Pot) 등 공산주의 나라를 세웠던 지도자들의 색깔이 빨간색이었고 지금도 빨간색이다. 설혹 일제가 만들어놓은 용어라 할지라도 ‘빨갱이’라는 용어 속에서는 ‘피’가 흘러나온다. 붉은 깃발 하에서 자행된 잔인한 학살의 희생자들에 대한 올바른 사실 전파가 우선되어야 한다.

그 이념이 달리 붉은색이 아닌 것은 그 이론이 특정인과 집단의 정치적 독점 권력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시대에 무덤 속 시체와도 같이 실패한 그 이념과 사상을 자신의 생각과 마음속에 각인했을 그 여고생의 당찬 목소리가 지금도 귀에 선하다.

목격과 경험의 위치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관점도 다를 것이다. 잘하고 잘못하고의 문제가 아닌, 지난 역사의 아픔을 놓고 서로 편을 가르고 손가락질 하면 결국 자중지란 분열상만 난무하게 될 뿐이다. 또한 무지막지했던 시기의 광기어린 바람이 불태우던 역사의 아픔을 특정 인물이나 집단의 책임인 것처럼 전가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는 역사의 왜곡이며 이 시대의 귀가 큰 아이들에게 또 다른 잘못된 가치관을 심는 것이다.

실패한 이념이나 사상으로는 결코 미래의 희망을 이야기 할 수 없다. 또한 아픈 과거의 역사에 특정 이념과 사상을 감성적으로 끼워 넣어 미화하려는 것도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전파하려는 자의 의도를 듣는 자가 미처 간파하지 못할 것이라 여겼다면 이는 큰 오판이다. 요즘 시중에 떠도는 시쳇말로 지켜보고 듣고 있는 자를 ‘개’나 ‘돼지’로 여기지 않는 다음에야 그런 용기 있는 행위의 실천을 계속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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