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항의 도시 ‘인천 근대역사 여행’
개항의 도시 ‘인천 근대역사 여행’
  • 전윤선 여행작가
  • 승인 2019.08.26 10: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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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특별한 여행지는 없어… 추억이 특별한 여행지를 만들어”

개항의 도시 인천으로 발길이 향한다. 신포시장은 개항의 역사와 함께 한 백년이 넘는 인천 대표 시장이다. 난전이 생겼을 당시 중국인들에 의한 20십여 곳의 채소가게로 시작했다. 고객은 주로 일본인들이었다. 중국 산둥성에서 씨앗을 가져와 근처 동화동과 숭의동 일대에 농사를 지어서 내다 판 곳이 신포시장의 시초다.

중국인들은 인천항이 개항하면서 몰려들어 인천이 중국 화농의 시초라고 한다. 지금도 중국관광객이 인천항을 통해 들어와 백년이 넘는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신포시장엔 중국과 일본인 관광객이 줄서서 닭 강정을 먹으니 세월의 변천사가 느껴진다. 백 년 전 중국인은 채소를 팔았고, 지금은 관광객으로 찾아와 닭 강정을 먹는다. 일본인은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손님으로 시장을 찾으니 세월 따라 사는 모습도 많이 변하는 추억의 시장이다.

▲ 신포시장 내 문화마당
▲ 신포시장 내 문화마당

- 닭강정과 쫄면

신포시장엔 닭 강정 말고도 먹거리나 볼거리가 많다. 인천을 원조(元祖)로 하는 먹거리 중에 쫄면은 신포시장이 시초이고 고향이다. 쫄면은 이곳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면서 국민의 사랑을 받아온 것이다. 학창시절 쫄면을 먹기 위해 시내 쫄면 집을 찾았다. 당시 쫄면집의 명성은 인근에 자자했고, 학생은 물론 직장인과 인근 주민 까지 쫄면을 먹기 위해 줄 서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곳의 메뉴는 쫄면과 냉면 딱 두 가지 뿐 이었지만 잘나가는 메뉴였고, 둘 중 어떤 것을 먹을지 행복한 고민 끝의 승자는 항상 쫄면이었다.

쫄면은 인천 중구 경동의 ‘광신제면’에서 냉면을 만들다가 우연히 불거져 나온 한 가닥의 굵은 면 가락이 쫄면의 시작이고 원조가 되었다고 한다. 보통 냉면 면발은 가늘고 길지만 면을 뽑는 기계 구멍을 잘 못써서 지금의 쫄면인 굵은 면이 나오게 된 것이다. 공장 사장은 순간 이것을 면으로 만들어 보면 어떨까 싶어서 공장 앞의 분식점에서 판매를 하게 된 것이다. ‘쫄면’이라는 이름은 1970년대 초 중구 인현동의 분식점 ‘맛나당’에서 주방장으로 일했던 노승희씨가 면이 쫄깃쫄깃하다고 해서 ‘쫄면’이라고 처음 이름 붙였다고 한다. 분식점 주인은 면을 고추장 양념으로 비벼 팔았는데 그 맛이 일품이어서 금세 입소문을 탔다. 냉면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불량 면이 인기를 끄는 음식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쫄면은 매콤하면서 깔끔한 맛을 즐기는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 오늘에 이른다.

시장 골목길 한편엔 예전 푸성귀 시장의 모습을 쉼터에 조형물로 만들어져있다. 조형물에선 어시장과 닭전으로 불리던 한때를 느낄 수 있고 생선가게나 횟집은 아직도 많다. 중국인은 서양채소인 양파, 양배추, 토마토, 피망, 시금치, 우엉, 부추를 난전에 펼쳐놓고 시장을 찾은 일본여성에게 팔고 있다. 낯선 채소는 일본인과 서양인들에겐 잘 팔리는 푸성귀였다. 그 옆에 한복을 입고 댕기머리 아들을 데리고 나온 조선의 아낙에겐 낯선 모양과 낯선 이름의 채소들이 신기하고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이 골목은 수선골목으로도 유명하다. 상점마다 수선의 역사를 보여주듯 허름하지만 작은 평수에 재봉틀 몇 대를 놓고 어떤 옷이든 손님이 원하는 대로 변신한다. 수선골목 끝 지점 빨간 등대는 신포시장의 대표 명물이다. 등대는 신포시장이 개항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신포시장에서 수녀님이 가끔 눈에 띄었다. 수녀님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의아해 하면 발길을 옮겼는데 시장 바로 앞이 성당이 있었다. 인천한복판 답동 언덕에 자리한 성당은 19세기 말 제물포에서 건립됐다. 개항기 때 제물포가 서울의 관문이고 외국 무역의 거점이 될 수 있는 좋은 입지적 조건을 갖췄기 때문이다.

답동성당
답동성당

- 천주교의 박애 정신

답동성당은 인천의 첫 번째 성당이며 웅장하고 화려한 자태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으며 문화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사적지로 지정됐다. 언덕을 올라 정문안으로 들어서니 위풍당당한 성당의 모습이 고풍스럽다. 붉은 벽돌로 쌓아 올린 건물은 유럽의 오래된 성당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벽돌 마다 나이테처럼 세월의 흔적을 발견 할 수 있다. 답동성당은 명동성당과 나이가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는 문은 삐걱 소리가 백 년 전으로 들어가는 출입문 같다. 창문의 스테인 글라스를 뚫고 햇살 몇 줄기가 영롱하게 스며든다. 천주교가 조선에 처음 유입됐을 때 온갖 박해를 견뎌내며 서민을 대상으로 선교가 널리 퍼져나갔다. 사람의 신분은 높고 낮음 없이 평등해 천주교의 종교관은 조선의 민중들에겐 계급사회에 대한 저항의 시초가 됐다. 종교는 또 다른 종교와 갈등을 빚기도 하고 조화를 이루기도 하며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몇 년 전 인도여행 중 캘커타 슈슈노바 중증장애 아동 보호 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활동을 잠시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난생처음 성당에서 미사를 봤다. 테레사 수녀는 가난한 인도 사람들을 박애 정신으로 보살폈다. 처음 접하는 천주교 의식은 낯설고 어색했지만 성스러운 종교 의식에 압도됐었다.

종교가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은 크다. 답동성당의 웅장한 건물에 압도되는 것은 마찬가지다. 종교는 나약한 사람의 마음을 굳건하게 지켜주는 절대적인 무엇이 되어준다. 실체는 보이지 않아도 끝없이 인간의 모난 성품을 다듬어준다.

▲ 무장애 관람 가능 한 근대문학관의 전시실 동선
▲ 무장애 관람 가능 한 근대문학관의 전시실 동선

- 개항의 역사를 품고

사람만이 언어를 자유롭게 구사 할 수 있다. 언어가 있었기에 사람은 문화를 일구어 낼 수 있고 언어로 구현한 문학은 문화예술을 만들어낸 원동력이기도 하다. 한국 근대사 문학도 마찬가지다. 일제 식민지라는 아픔을 겪으면서도 우리의 근대문학은 발전해왔고 오늘날 한류라는 한국문화의 풍성하고 우람한 집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되었다.

개항의 역사를 품고 있는 인천은 근대 문학이 한곳에 집합해 있다. 근대 문학관은 인천문화재단과 인천시가 힘을 합쳐 만든 전국 최초의 공공종합문학관이다. 이곳은 개관한지 얼마 안 돼는 따끈따끈한 문학관이다. 건물은 백년의 세월을 살아온 인천 개항의 근대역사의 건축물이다. 근대사 문학관은 몇 년 전 부터 인천시가 개인이 가지고 있던 문학관 건물을 사들면서 원형에 가깝게 리모델링해 백 년 전으로 시간여행을 떠날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 이다.

교과서에 실린 역사 중엔 한국 근대사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책속에 누워있는 활자로 공부하는 것 보다는 싱싱하게 살아있는 현장의 교실에서 더 선명하고 역동적인 근대 역사를 공부한다면 훨씬 효과적일 것이다. 교과서가 채택되는 동안 많은 논쟁도 있었다. 논쟁이 됐던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고 논쟁의 쟁점 중엔 수탈을 수출로 기술했거나, 위안부가 일본군 부대를 따라다녔다고 서술해 친일왜곡 교과서라는 오명을 덮어쓰게 된 후 최종 본에는 “강제로 끌려 다녔다”로 바꿨고 ‘의병을 토벌했다’를 ‘학살당했다’로 고쳤다. 이처럼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면 그 당시를 살지 않았던 학생들은 왜곡된 역사관을 가질 것이기 때문에 사실에 근거하여 제대로 된 역사를 배워야한다.

인천 근대 문학관엔 어떤 문학들이 살아서 관람객에게 말을 걸고 있을까. 근대 문학관은 상설전시와 기획전시, 작은 전시로 구성돼 있다. 왕조의 몰락과 근대국가의 열망 속에서 신문학의 씨앗을 뿌린 근대 계몽기 때의 신소설과 역사전기물, 문명개화와 자주독립의 열망을 노래한 곡도 있다. 근대문학에서 익히 알고 있는 유명 작가나 작품이 총 집합해 있다. 황순원, 이상, 한용운, 김동인, 김소월까지 당시 문학의 거장들의 작품을 볼 수 있어 백 년 전의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졌다. 전시장 초입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경부선철도 노래다. 경부선 철도 노래의 가사는 지금 쓰이는 글과는 많이 다르다. 가사 중간 중간 알 수 는 글들이 암호처럼 엮여있지만 멜로디는 경쾌하다.

“우렁타게 토-하난 긔뎍소리에
남대문을 드 ㅇ 디고 ㅅ더 나나가 서
쉘니부난 바-람의 형새갓흐니
나개가딘 새-라도 못사다르 했네.”

가사만 읽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알 수 없지만 그 옆에 바로 암호 같은 당시의 글을 풀이해 놨다. 만일 당시의 가사를 풀이해 놓지 않았다면 세대 차이를 실감했을 것이다. 아니 가사를 보는 순간 백 년 전 시간이 결코 짧지 않음을 느끼게 충분했다. 언어는 살아 움직이는 강물 같다. 끝없이 흐르면서 변화를 거듭하는 언어와 글은 시대를 반영하고 시대는 문화를 만들어 낸다. 당시 나라를 빼앗긴 혼돈의 시기에도 언어와 글로 문화를 꽃피워 지금의 한류를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처음부터 특별한 여행지는 없다. 그곳에서 추억을 만들었기에 특별한 여행지가 되기 때문이다.

•가는 길 : 동인천역에서 내려 신포시장 방향 1킬로미터 남짓
인천장애인 콜택시 ☎1577-0320

•먹거리 : 화평동 세숫대야 냉면 거리(동인천역 근처) / 신포시장 닭 강정

•접근 가능한 장애인화장실
동인천역, 신포시장 내

•무장애여행문의
한국접근가능한관광네트워크
http://cafe.daum.net/travelwheel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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