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의 눈과 팔이 되어준 우리는 ‘행복 전도사!’
서로의 눈과 팔이 되어준 우리는 ‘행복 전도사!’
  • 박소윤 기자
  • 승인 2019.08.26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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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 장애인 부부가 살아온 아름다운 이야기
2019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
가연상[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수상자 '백갑철 김상미 부부'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적인 삶으로 귀감이 되고 있는 모범장애인 부부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7월3일(수) 여의도 GLAD호텔에서 모범 장애인 부부 41쌍을 초청해 ‘2019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 최고 영예의 상(가연상)을 수상한 백갑철•김상미 부부의 수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백갑철•김상미 부부(2019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 시상식 사진 중에서)
▲백갑철•김상미 부부(2019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 시상식 사진 중에서)

Q. 장애는 어떻게 발생되었나요?

어머니는 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여 저를 유모에게 맡기고 직장을 다녔습니다. 생후 100일 무렵 유모는 저를 업고 외출을 하다 교통사고가 나서 그 자리에서 돌아가시고서는 머리를 바닥에 부딪쳐 뇌진탕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많은 수술로 왼쪽 팔다리가 불편해졌으며 말도 어눌해져 바깥출입도 점점 줄어들고 늘 위축된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불편한 몸이었지만 장애등급판정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며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관심을 갖지 않았으나 결혼을 하고 남편은 시각 1급, 저는 뇌병변 1급 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Q. 어머니의 아버지,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엄격하셨나요, 자상하셨나요?

평소 무뚝뚝하고 말수가 없으셨던 아버지는 고위관리직의 별장을 지을 정도의 실력 있는 건축가로 약주를 좋아하셔서 아버지 곁에 가면 단감냄새처럼 달달한 술냄새가 솔솔 났습니다. 어머니는 키도 크고 미인에 소문난 멋쟁이셨습니다. 불편한 몸이지만 주어진 일을 끝까지 완수하는 저를 늘 자랑스럽다고 하시며 제 볼을 따듯하게 어루만져 주셨던 기억납니다.

Q.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은 가족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아버지는 건축업을 하셨고 어머니는 간호사를 하셨습니다.

Q. 어머니가 살던 동네의 풍경이 기억나나요? 가장 좋아하던 곳은 어딘가요?

저는 서울 종로구 무교동에서 태어나 생후 100일 무렵 교통사고로 인해 장애를 입고 부모님이 맞벌이를 하다보니 보살펴줄 사람이 없어 외가댁에 맡겨졌습니다. 충남 홍성군 갈산면 상촌리에 위치하고 있는 외가댁은 아주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 마을이었습니다. 하교 후 동네 언덕 위에 가만히 앉아 살랑 살랑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밥 짓는 연기가 솔솔 피어나는 굴뚝을 내려다보는 일이 제 하루일과의 마무리였습니다.

Q. 어머니가 고향을 떠난 건 언제인가요? 그때 어떤 기분이 들었는지 알려 주세요.

고등학교 졸업 후 엄마 병간호를 위해 서울에 가는 장항선 새벽기차를 타던 그날 기차역은 다른 날보다 안개가 무척 자욱했습니다.

장애가 생긴 이후 맡겨진 외가에서 저의 유년시절과 사춘기를 다 보냈기에 친정을 떠나 시집을 가는 기분처럼 무척 서글픈 마음이 들어 외할머니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볼수 없었습니다. 외할머니께서 불편한 몸으로 역까지 배웅을 나와 제 손에 따듯한 계란 2알과 사이다 한 병을 쥐어주시며 여기서 고생 많았다고, 엄마 옆에서 잘 지내라고 눈물을 보이셨습니다.

Q.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제가 신앙생활을 하게 된 동기입니다. 어느 날 순복음중앙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면 불편한 왼팔이 낫는다는 말을 듣고 교회를 가는 날이었습니다. 좁은 골목길 맞은편에서 지나오는 트럭을 피해 한쪽으로 비켜섰는데 제 왼쪽 발등 위로 트럭의 바퀴가 지나가는 사고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트럭이 발등 위를 지나갔는데 아프기는커녕 ‘커다란 풍선이 사뿐히 발 위를 지나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저는 아무렇지도 않았습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처하나 없이 발은 괜찮았으며 순간 “하나님이 나를 귀하게 여겨 지켜주시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그 순간은 지금 생각해도 믿기지 않으며 잊을 수 없습니다.

Q. 어머니의 초등학교 시절은 어땠나요?

집에 혼자 있던 날이 많이 그럴 땐 그림을 많이 그렸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가서 친구 초상화를 그려 주었는데 너무 좋아하였으며 친구들이 하나, 둘 저를 찾게 되었고 그들과 마음의 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초등학교 동창이 “상미 네가 그림을 그려주면 친구들이 너무 좋아했고 심지어 옆반 아이들까지 줄을 서서 기다리고, 친구들 미술숙제도 도와 줬던 기억이 난다”라며 잊고 있던 기억을 이야기해줘서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습니다.

Q. 어린 시절 친구들과 자주했던 놀이가 있나요? 무슨 놀이를 가장 잘했나요?

맞벌이로 몸이 불편한 저를 돌보기 힘드셨던 부모님은 저를 충남 홍성에 있는 외가에 맡기셨습니다. 겁도 없었는지 캄캄한 하늘에 별이 반짝이도록 사촌들이랑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산딸기, 오디 먹으면서 손과 입술이 새카맣게 변할 때까지 놀았습니다. 마땅한 놀이도 없이 마냥 뛰어다니는 사촌들을 불편한 몸으로 따라다니며 그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Q. 어린 시절 자주 먹던 음식, 혹은 가장 먹고 싶었던 음식은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외가댁은 이모도 많고, 사촌들도 많아 늘 꽁보리밥에 나물 반찬을 먹다 보니 쌀밥에 고깃국을 실컷 먹어 보고 싶었습니다. 지금은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지내니 참 좋은 세상인 것 같습니다.

Q. 누구에게나 오는 사춘기, 어머니의 사춘기 시절에는 어떤 일이 있었나요?

사춘기 시절 다른 아이들과 다른 내가 부끄럽기 시작했으며 사진 찍는 것 피하게 되고 혹시라도 찍게 되면 오른손을 왼손 위에 덮어서 감추기 바빴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눌한 말은 또래 아이들의 멋모르는 놀림의 비수가 되어 집 밖에 나가지 못하는 상황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Q. 처녀 시절 어머니에게는 어떤 미래에 대한 고민이나 기대가 있었는지 들려주세요.

고등학교 졸업 후 사회생활을 준비할 겨를도 없이 서울에 계신 어머니네 집으로 갔습니다. 평소 어머니는 자꾸 소화가 안된다 하셨는데 결국 장협착증 진단을 받고 장을 30cm나 절제하는 수술을 받으셨습니다.

수술 후 건더기 있는 음식을 전혀 드시지 못해 미음을 끓여 드렸고, 식사시간 외에는 늘 힘없이 창밖을 내다보는 어머님 손을 잡아드리는 것 외엔 해드릴 수 있는 일이 없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픕니다. 20대의 저는 제 미래에 대한 고민과 기대보다는 빨리 어머님이 완쾌하시기만을 기도드리는 나날을 보냈야 했습니다.

Q. 양가 부모님의 반응은 어땠나요?

남편을 만나기도 전에 시어머님께서 김천에서 서울까지 저를 먼저 보러 오셨고 무척 흡족해 하셨습니다. 친정어머님께서도 남편을 만나보시고는 앞이 보이지 않는 큰 장애를 가진 사람이지만 장애를 극복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 대견하였다며, 이 사람이라면 너를 평생 맡길 수 있겠다고 하며 결혼을 흔쾌히 승낙하셨습니다. 그런 어머님이 결혼할 때쯤 병환이 깊어지셔서 결혼식장에 와 보지도 못한 것이 마음이 아픕니다.

Q. 살면서 어떤 힘든 점이 있었나요?

2013년 7월쯤이었습니다. 잠을 자는데 왼쪽으로 돌아서 잘 때마다 너무 아파서 잠이 깰 정도의 고통이 느껴졌습니다. 근처에 있는 병원에 갔더니 가슴에 조그마한 혹이 있는데 여기서는 알 수 없고 서울 큰 병원에 가보라고 하였습니다. 유방암 2기였습니다.

이제 조금 숨 돌리고 살 만하니 이런 일이 생기는구나 싶었습니다. 항암치료, 방사선치료를 받으며 머리카락이 군데군데 빠졌고, 입맛이 없어서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해 그렇지 않아도 말랐던 몸은 10kg씩이나 줄었습니다. 수술 후 1주일을 입원, 33번의 방사선 치료를 위해 서울에 있는 동생 집에서 통원치료를 하였으며 혼자서는 식사도 제대로 할수 없는 남편은 대구에서 아들이 김천으로 출·퇴근하며 아버지를 돌보았지만 많이 힘들어 했습니다.

내가 옆에 없어 많이 힘들었을 남편은 자신의 불편함은 뒷전이고, 아무 걱정하지 말고 치료만 잘 받고 오라며 이야기하던 그 따듯한 목소리가 아직까지도 제 귀에 선합니다. 그런 남편이 있었기에 암과 싸워 이길 수 있었습니다.

Q. 남편을 처음 만났던 날 기억하시나요? 어떻게 결혼 결심을 하셨나요?

시이모님의 소개로 동생들과 함께 남편을 만나러 서울에서 김천으로가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남편은 시각장애 1급으로 고등학생 시절 자전거를 타고 등교하다가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실명이 되었는데 사고 이후 대구 광명학교(시각장애인 특수학교)에서 점자, 안마, 지압교육을 꾸준히 받아 안마와 지압소를 운영하는 성실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남편을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이 끌렸습니다. 다정한 언행과 선한 눈을 보니 마음이 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 사람이 면 나와 같이 남은 인생을 자박자박 걸어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어 처음 본 순간부터 결혼을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Q. 신혼 때나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힘들었던 기억은 무엇인가요?

제 인생 가장 큰 고비가 아닌가 싶습니다. 세상이 뭐 그리 빨리 보고 싶었는지 8개월 만에 태어난 아이는 낳자마자 입술이 파랬고 숨소리가 쌕쌕거렸습니다. 어디서 들어보지도 못한 ‘청색증 심장기형’이라는 진단이 나왔습니다. 눈앞이 캄캄해진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구나 싶게 정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 같았습니다.

아이가 숨이 쉬어지지 않아 그 가느다란 목에 구멍을 뚫고 튜브를 끼워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되었으며 저는 그날부터 아이 옆에서 한시도 떠날 수 없었습니다. 눈물로 밤을 지새우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다가도 내가 정신을 잃으면 아이도 없다는 생각에 싶어 입술을 꽉 깨물어 피가 맺히는 날이 수도 없었습니다.

너무 작고 가느다란 우리 아이를… 감히 함부로 안을 수도 없었던 우리 아이를… 생후 8개월 때 수술대에 눕혔던 그날… 서늘한 수술실 밖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또 빌었습니다. ‘하느님 내 목숨 가져가세요. 우리 아이는 아직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 잘못 만나서 이렇게 힘든 일을 겪는 거예요. 하느님 제발 내 목숨 가져가세요’ 저의 간절한 마음을 하느님께서 알아주셔서 심장재단의 도움을 받아 무료로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으며 경과는 좋았습니다.

아이는 퇴원하고 나서도 빠는 힘이 약해서 모유대신 분유를 먹였는데 저 역시 오랜 병간호로 인해 몸과 마음이 너무 많이 지쳐버린 상태인지라 누워서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남편은 직장에 나가고 시어머님께서 밭에서 일하다 말고 뛰어와서 아이 기저귀를 갈고, 분유를 먹이고, 저까지 챙겨주셨으니… 정말 시어머님께서 안 계셨다면 아이를 어떻게 키웠을지 정말 감사할 따름입니다.

Q. 어머니는 어떻게 아기를 키우셨나요? 남다른 육아방법이 있었는지 알려주세요.

저는 지금도 아이 생각하면 미안한 마음이 앞섭니다. 남편의 성품을 닮아 걸음마 하던 시절부터 사고치는 일도 없었고, 학창시절에도 유별난 사춘기 없이 무난히 잘 넘겼습니다. 저와 남편이 장애가 있어 아이와 함께 뛰어 놀 수도, 자유롭게 여행을 갈 수도 없었기에 아이의 이야기에 온전히 귀 기울여 들어준 것은 그 어떤 부모보다 잘 했다고 자신합니다. 그 때문인지 아이는 자신보다 남의 불편함에 귀 기울여 주는, 남을 위해 일하는 사회복지사가 되어 온 가족에게 받은 사랑을 베풀어 주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Q. 아기를 낳고 키울 때 아버지가 어머니를 많이 도와주셨나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라 직접적인 도움을 줄 수는 없었지만, 한결같이 온화한 남편의 성품은 아이가 올바르게 자라는 데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심장 수술을 할 때 힘든 내색 한 번 없이 아버지, 남편의 자리를 지켜주며 제가 절망에 빠졌을 때 열 마디 말보다 따뜻하게 안아주던 남편의 품은 제게 큰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Q. 육아를 하며 힘들 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것이 있다면 무엇인지 알려주세요.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아프리카 원주민 부족에서 내려오는 말이 있습니다. 출산 후 아이 병간호로 인하여 급격히 몸이 약해져 시댁에 들어갔는데 시부모님, 시누, 어린 조카들까지 힘을 모아 함께해주셨습니다. 조카들이 많았지만 시부모님께서는 우리 아이만 유독 신경을 많이 써주셔서 ‘우리 할머니’가 아니라 ‘승주(아들 이름) 할머니’라고 말할 정도로 질투도 많이 했다고 가족 모임 때마다 웃으면서 이야기합니다.

Q. 예전보다 좋은 집으로 이사 가던 날, 기분은 어떠셨는지 들려주세요.

방 한칸에 옹기종기 세식구 살던 집에서 아들방이 따로 생기는 2층집으로 이사를 하니 아들은 “이 집이 정말 우리집 맞아요?”라고 몇 번씩이나 되물을 정도로 신나했습니다. 집도 새로 생기고, 아들도 건강하게 잘 자라주니 앞으로는 행복한 일들만 가득할 것이라는 마음에 우리 부부는 이사 첫날 피곤함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들떠서 잠을 제대로 못 이룰 정도였습니다.

Q. 어머니에게 자녀가 가장 자랑스럽게 느껴진 건 언제였나요?

아이가 감기라도 걸려서 밤새 콜록거리기라도 하면 모든 부모는 자신의 잠보다 아이의 상태에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잠도 못 잘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 이상이 있어서 병원에서 있었기에, 지금 숨쉬고 걷고 말하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몸이 허약했지만 학창시절부터 대학졸업까지 쭉 장학금을 받고 다녔습니다. 어려운 형편에 아이의 등록금 걱정 없이 다닐 수 있게 한 것 역시 감사합니다.

어렸을 적 자신을 키워주신 할머니, 할아버지께 아침저녁으로 안부 전화를 드렸고 시키지 않아도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행동은 사촌들에게 진정한 효도의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7월3일 여의도 GLAD 호텔에서 모범 장애인 부부를 초청해 ‘2019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를 개최했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7월3일 여의도 GLAD 호텔에서 모범 장애인 부부를 초청해 ‘2019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를 개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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