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비포커스] 너에게 눈을 줄게
[무비포커스] 너에게 눈을 줄게
  • 김윤교 기자
  • 승인 2019.09.24 18: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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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멘타리 영화 '시소'/ 고희영 감독/ 2016 개봉/ 한국
이동우와 임재신 출연, 그들의 특별한 동행

 

[소셜포커스 김윤교 기자] = 아메리카노를 좋아한다.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능한 향과 한 입 삼켰을 때 입 안에서 살아나는 맛. 커피를 즐겨 마신 덕분에 매번 위염에 시달린다. 좀 순한 차들을 마신다면 괜찮을 텐데. 일상에서 커피를 끊는 일은 좀처럼 쉽지가 않다.

건강한 차 한 잔을 닮은 영화 한 편을 봤다. 바로 고희영 감독의 영화 ‘시소’이다. 평소 다큐멘터리 영화를 즐겨보는 편은 아니다. 뭔가 무료한 느낌이랄까. 영화에서만큼은 일상과 다른 것을 맛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 다큐멘터리 영화는 그런 편견을 깨는 작품이다. 고요하지만 강하다.

영화 제목을 기가 막히게 잘 지었다. 한국어로는 ‘시소’, 영어로는 ‘see-saw’ 그러니까 보는 사람 임재신과 봤던 사람 이동우가 주연이다. 또 혼자서는 탈 수 없는 놀이기구가 시소이기도 하다. 친구와 함께 둘이 호흡을 맞춰야 재미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니까 둘의 관계성을 보여주는 상징성이 좋다.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고희영 감독이 “상상력이 현실을 이길 수 없어요”라고 이야기 한 것을 읽은 적 있다. 그만큼 영화에 있어서 그녀만의 확고한 지점이 있는 듯하다. 현실 속에서 어떤 점들에 주목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사람이다. 2016년 개봉한 제주 해녀의 생사를 그려낸 ‘물숨’이나, 그릇을 위해 평생 불과 싸운 천한봉 명장의 삶을 다룬 ‘불숨’(2019년)만 봐도 알 수 있다. 결코 가볍지 않은 묵직한 현실들. 상상보다 훨씬 명작인 현실을 관객에게 보여주는 감독이다.

영화의 시작은 이렇다. ‘망막색소변형증’으로 시력을 잃은 이동우에게 자신의 망막을 기증하겠다며, 한 사람이 전화를 한다. 그 사람이 바로 임재신이다. 근육이완증으로 눈 빼고는 아무 것도 마음대로 움직일 수 없는 사람. 그런데도 망막을 기증하겠다니. 이렇게 두 사람은 인연이 되어 제주도 여행을 한다.

이동우는 궁금하다. 임재신이 왜 자신에게 눈을 주겠다고 한 것일까? 임재신에게는 딸이 하나 있다. 그의 딸이 어릴 때 잘못을 하면 혼을 낸 후 임재신은 괜찮다며 안아주고 싶은데 몸이 불편해서 그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갑자기 시력을 잃은 이동우와 딸의 사연이 나오는 방송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된 것이다. 어린 딸이 그린 그림을 볼 수 없는 아빠 이동우의 모습에서 과거 자신의 안타까움을 보았던 것일까. 임재신은 그렇게 이동우에게 전화를 걸게 된다.

결국 눈은 기증받지 못했다. 망막색소변형증은 망막 이식으로 좋아질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동우는 임재신을 통해 진짜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얻게 됐다고 말한다.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지 비로소 알게 된 것이다. 영화를 다 보고나면 이동우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새로운 눈이 생긴다.

둘을 따라가면 함께 제주 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한다. 영화는 자주 제주의 바람소리를 들려주는데 그래서인지 영화가 끝난 지금도 제주의 억새 바람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사려니 숲의 나무와 바람이 오래 남을 것 같다. 이런 그림 같은 풍경들은 보고만 있어도 감정 정화가 된다.

임재신은 제주에서 의미 있는 도전을 하게 되는데,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휠체어 잠수를 시도한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영화를 보는 내내 조마조마한 심정이 되기도 한다.

여행 내내 두 사람은 서로에게 눈이 되어 주고, 팔다리가 되어 준다. 그리고 이런 방식이라면 세상 어디든 갈 수 있겠다고 말하는 두 사람. 그렇게 살면 되는데 우리는 그게 왜 이렇게 어려운지 모르겠다. 아마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주며 살기 보다는 내 부족함을 채우는데 급급하기 때문은 아닌가 싶다. 누구라도 이 영화를 보는 이들은 둘을 보며 울다 웃다 하리라 짐작한다.

동화 같은 대사들도 있다.

"재신아, 만약에 만화처럼 말이다. 우리가 각자 졸은 거야. 근데 깨보니까 바로 이 자리에서 너랑 나랑 나무가 돼 있는 거야. 그럼 나는 너한테 그런 말을 할 것 같아. 재신아, 뭐 이런 일이 다 있냐? 우리 나무가 됐어. 좋지 않냐? 다행이지 않냐? 그리고 나... 보여. 네가... 보여."

"난 서 있어. 형! 나 지금 서 있어."

"그래, 너 진짜 굳건해 보인다."

삶 속에 아름다운 이야기가 숨어 있다. 그걸 발견하는 눈이 우리에게 없을 뿐이다. 우리는 보지 못하는 것을 선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영화다. 혼탁한 세상에 지친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하고 싶다. 영화가 다 끝날 즈음 조금은 건강해진 정서를 느낄 것이다.

가끔 우리는 아프다. 세월에 베이고 사람에게 베여서다. 문득 찾아오는 공허는 또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외롭다. 그런 것들이 우리 삶을 위협할 만큼 치명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날인가 돌아보면 따끔하다. 이동우와 임재신에게도 그런 시간들이 분명 있었으리라. 이 영화가 그런 시간들의 고백 같다. 고백은 용감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용감한 그들에게 오래 박수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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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 2019-09-24 21:35:44
상상보다 훨씬 명작인 현실이라..직접 확인해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