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처럼 늘 그 자리에서’
‘지금처럼 늘 그 자리에서’
  • 이귀만 · 박점순 부부
  • 승인 2018.11.14 15:21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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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가정으로 겪었던 어려움 및 극복과정, 변화된 이야기

가연상 佳緣賞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수상자 이귀만 · 박점순 부부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적인 삶으로 귀감이 되고 있는 모범장애인 부부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10월12일(금) 여의도 GLAD호텔에서 모범 장애인 부부 47쌍을 초청해 ‘2018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 최고 영예의 상(가연상)을 수상한 이귀만 박점순 부부의 수기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이귀만 · 박점순 부부 가족 사진(자녀 결혼식 사진 중에서)
▲이귀만 · 박점순 부부 가족 사진(자녀 결혼식 사진 중에서)

꽃다운 나이 21살 되던 해, 3살 연상인 남편을 만나 1977년에 결혼했습니다. 남편은 저와 결혼하면서 개인 운송업을 시작하였고 경제적으로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항상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는 남편의 모습을 보면 듬직하고 많이 의지가 되었습니다. 
결혼한 지 1년이 조금 지나 저희 부부에게 첫아이가 생겼습니다. 남편과 함께 기쁨을 나누며 지금 이 순간을 축복하였습니다. 부모가 처음인 우리 부부는 이런저런 시행착오도 겪어가며 아이 양육하기에 바빴지만 그 안에서 기쁨과 삶의 이유를 찾게 되어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가득 찬 행복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첫아이가 태어나서 밤낮 못 자며 아이와 같이 울며 생활하던 때가 제 인생에서 제일 행복했던 때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2년 뒤 둘째가 생겼고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하는 의심이 갈 만큼 행복의 연속이었습니다.
행복함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20여 년을 보냈고 순식간에 두 아들은 의젓하게 성장하여 한 가정의 가장이 되었습니다. 부모로서 숙제를 다 끝낸 듯 한 기분에 홀가분하면서도 벌써 어른이 되어 한 가정의 가장이 되는 아들의 모습에 쓸쓸하기도 했습니다. 
두 아들 모두 독립하여 보내고 저희 부부는 둘만의 생활을 보냈습니다. 특별히 좋을 것도 안 좋을 것도 없는 평범한 일상이었습니다. 그런 저희 부부에게 예상치도 못한 큰 시련이 다가왔습니다. 

지금으로부터 9년 전, 2009년 8월 4일이었습니다. 여느 때와 같은 날 아침이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일어나 식사하고 TV를 보며 아침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나란히 소파에 기대어 TV를 보고 있던 저는 볼일을 보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습니다. 
화장실은 오전에 남편과 제가 씻고 난 후라 바닥에 물이 흥건했지만 평소에도 늘 물이 흥건한 화장실을 사용했던 터라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움직이는 순간, 천장이 보이는 듯 하더니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몸에 충격이 오면서 눈앞이 캄캄해졌습니다. 꿈속에 갇혀 있는 듯 깊은 어둠 속에서 무거워진 몸을 일으켜 벗어나려고 할 때 캄캄해졌던 시야가 서서히 걷히고 눈이 떠졌습니다. 
소독약과 약품 냄새들이 코를 찌르고 눈에는 새하얀 천장이 들어왔습니다. 주변에서는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와 울음소리가 가득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자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부르던 남편의 얼굴이 보였습니다. 눈물이 글썽글썽하던 남편의 눈에서 곧 눈물이 흘러내리며 제 손을 붙잡고 아이처럼 펑펑 울었습니다. 그런 남편의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 오른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편 눈물은 그대로 뺨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그때 이상함을 느꼈습니다. 
저는 황급히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분명 제 오른손이 보이는데 남편의 눈물을 닦아주지 못하고 그대로 침대 위에 올려져 있었습니다. 왼손도, 다리도, 어깨도, 팔도, 제 몸은 어느 것 하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곧이어 흰색 가운을 입은 중년의 남성이 다가왔습니다. 저에게 이런저런 얘기를 하며 몸을 움직여볼 것을 권유했고 저는 혼란스러웠지만 그의 말에 따라 반응하려 했지만 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후 중년의 남성은 제게 전신마비라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믿을 수 없었습니다. 전신마비라고 말을 하는 남자를 붙잡고 아니라고 소리치며 부정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 몸은 움직이지 않았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참을 울었습니다. 한참을 절망했습니다. 절망에 빠져 한참을 울고 있을 때 남편이 제 손을 붙잡고 절망에 빠진 저를 끌어올려 주었습니다. 
남편의 두 눈은 슬픔에 가득 차 있었지만 희망을 잃지 않는 눈이었습니다. 남편의 힘 있는 손과 눈빛에 저는 점차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우리 부부의 희망인 듬직한 두 아들이 왔습니다. 걱정스런 얼굴로 저를 걱정하는 두 아들을 보자마자 조금 전까지 절망했던 저 자신을 숨겨야 했습니다. 아들들에게 걱정을 떠안기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괜찮다는 눈빛으로 아들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차근차근 남편과 두 아들을 순서대로 바라보았습니다. 가족을 보자 힘이 났습니다. 아니, 힘을 내야 했습니다. 
두 아들에게 저는 항상 웃으며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던 강한 엄마였고 남편에게는 흔들림 없이 옆을 지켜온 현명한 반려자였습니다. 사랑하는 세 남자를 위해 무너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했습니다.

이후 몇 가지 검사를 한 뒤 수술을 진행하였습니다. 수술 결과는 끔찍하게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또 한 번 절망했지만 흔들리는 마음과 심약해진 저를 잡아주는 건 변함없이 제 옆을 지켜주던 남편이었습니다.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제 몸을 위해 남편은 
쉬지 않고 매일 움직였습니다. 제 몸을 깨끗이 닦아주고,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는 저를 대신해 다 받아주었으며, 몸에 좋다는 건 다 챙겨와 떠먹여 주었고, 하루 종일 병실에 있으면 심심할까봐 휠체어에 저를 옮겨 매일 병원 근처로 산책을 함께 나갔습니다. 이런 남편이 없었다면 전 벌써 삶을 포기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꾸준히 저의 옆을 지켜주던 남편이 다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두 아들을 장가보낸 뒤 집에서 쉬던 사람이었는데 운전대를 다시 잡았습니다. 병원에서 각종 검사와 수술, 그리고 오랫동안 재활과 치료를 진행하면서 돈이 많이 필요한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제 앞에서 내색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낮 동안은 남편이 옆에서 병간호를 해주었고 밤이 되면 두 아들이 교대로 제 옆을 지켜주었습니다. 밤새 운전대를 잡은 남편은 아침이 되어 아들과 교대를 할 때면 얼굴에 피곤함이 가득했습니다. 

옆에서 항상 웃으며 말을 걸어주던 남편의 모습이 점차 줄어들며 벽에 기대어 부족한 잠을 보충하는 모습이 많아졌습니다. 그런 남편에게 미안했지만 그땐 뭐가 그렇게 서운하고 힘들었는지 남편에게 온갖 짜증을 부렸습니다. 
그럴 때면 남편은 바보 같은 미소를 짓고는 미안하다며 환하게 저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런 제가 한심하고 부끄러웠습니다. 제가 마치 우리 가족들에게 짐이 되는 것만 같았고 나 하나 없으면 남편과 아들들이 고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숨죽여 우는 저의 울음소리에 깬 남편은 어떠한 이유도 묻지 않고 안고 달래주며 말했습니다.
“내 평생소원이 있다면 당신에게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것이었다. 그 평생의 소원이 잘못된 방식으로 이루어졌지만 내가 당신에게 매일 밥을 떠먹여 줄 수 있어서 고맙고 내가 당신 곁에서 이렇게 숨을 쉬고 말을 해줄 수 있어서 너무 행복하다. 그러니 당신이 미안해할 일도 고마워할 일도 없다. 지금 당장 힘을 내지 않아도 된다. 다시 일어설 마음이 생길 때까지 옆에서 지켜주겠으니 쉬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마.”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날 고마움과 미안함과 행복함의 눈물을 하루 종일 흘렸던 것 같습니다. 
옆을 지켜준 남편을 위해서 그리고 걱정하고 있을 두 아들을 위해서 힘을 내자고 다짐하며 치료와 재활에 힘썼습니다. 그러자 제 몸이 조금씩 반응하면서 움직여졌습니다. 
병원과 재활치료센터를 이곳저곳 옮겨 다닌 지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병세가 많이 호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시간이 조금 더 흐르자 곧 저는 보조기구의 도움을 받았지만 혼자 힘으로 보행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후 남편은 저의 모습을 보고 저에게 조금이나마 더 보탬이 되고자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남편을 볼 때면 큰 힘이 되고 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 부부에게 세상은 또 한 번 불행을 안겨 줬습니다. 한평생 저를 위해 지켜주고 힘이 되어주던 남편이 쓰러졌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했지만 황급히 구급대의 도움을 받아 병원으로 이송했고 의사선생님들이 오고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며 많은 말들이 오고 갔습니다. 각종 검사가 순식간에 이루어졌습니다. 
남편 곁에서 신께 기도했습니다. 평소에 종교를 믿었던 건 아니었지만 신이 있다면 제발 남편만큼은 아무런 일도 없이 건강하게 있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검사가 끝나고 의사선생님이 결과를 말해주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결과는 열심히 기도했던 저의 바람과 달리 크나큰 병명이었습니다. 
뇌수막염… 뇌수막염으로 인해 지능저하도 우려된다는 의사의 추가 설명이 있었습니다. 충격적인 결과에 믿기지 않았습니다. 급한 연락을 받고 온 아들들도 많이 놀란 모습이었습니다. 두 아들을 보니 참았던 눈물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우리 아들들에게 엄마의 장애에 이어 아빠의 장애까지 안겨주게 된 것 같아서 너무 속상했습니다. 그렇게 우리 셋은 의식 없이 누워있는 남편의 곁에서 한참을 울었습니다. 

시간이 조금 지나 먼저 울음을 멈춘 큰아들이 목을 가다듬고 얘기를 했습니다. “어머니가 쓰러졌던 날 아버지와 우리들은 오늘처럼 많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흘리던 눈물을 곧 닦아내시고 자리에 일어나셔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셨어요. ‘어머니가 쓰러진 건 무척이나 가슴 아프고 힘든 일이지만 우리까지 이렇게 주저앉아 있으면 안 된다. 어머니는 혼자서 병마와 싸우고 많이 심약하고 지쳐 있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우리가 슬픈 얼굴로 우울감만 주면 기운 나던 사람도 쓰러진다. 힘들겠지만 긍정적인 생각으로 밝은 모습을 보여주며 어머니에게 힘을 주고 격려해주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를 병간호하던 아버지는 항상 불안하고 흔들리셨지만 아픈 어머니 모습을 보면서 힘을 줘야 한다며 흔들리는 마음을 몇 번이고 다잡던 아버지입니다. 어머니도 우리도 같이, 함께, 힘을 냅시다. 우린 지금 힘든 고난과 역경을 마주하고 있지만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을 하던 큰아들의 모습에서 제 남편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큰아들의 말을 듣고 저와 작은아들도 같이 흘리던 눈물을 닦고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병실에 들어온 남편을 보고 마음이 아프고 약해질 뻔했으나 큰아들의 말을 되새기면서 두 주먹을 불끈 쥐었습니다. 저에게 남편이 해주었던 정성과 노력, 이젠 제가 보답해줄 차례였습니다. 

남편의 사고로 개인운송업을 하던 차량을 팔았고 경제활동을 전혀 하지 못하는 저를 대신해서 두 아들들이 치료비와 수술비를 마련하였습니다. 그리고 몸이 불편한 저를 대신해서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병원에 들러 병간호를 함께해 주었습니다. 우리 가족 모두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어주고 힘이 되어주었습니다.
2년이 다 되어갈 무렵, 지극정성으로 우리 가족 모두가 남편을 보살펴준 덕분인지 눈에 띄게 좋아져 조금은 어눌하지만 의사표현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부자연스럽지만 혼자서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두 번의 시련이 있었지만 우리 가족은 똘똘 뭉쳐서 잘 극복해 내었고, 앞으로 힘든 일이 닥쳐와도 잘 이겨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저희 부부는 매일 아침 일어나면 운동을 하러 집을 나섭니다. 집 근처 공원을 가볍게 한 바퀴 걷고 함께하는 스트레칭으로 굳은 몸들을 풀어줍니다. 
운동이 끝나고 근처 벤치에 앉아서 쉴 때가 가장 기분 좋은 시간입니다. 옆에 나란히 앉아 쉬는 남편을 보니 문득 옛 기억이 떠오릅니다. 저희 부부가 결혼식을 올렸던 그날, 식이 끝나고 옆에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연신 방글방글 웃고 있던 남편이 “항상 이 손 놓지 않을게.” 하며 잡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더 주던 남편의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때부터였습니다. 투박하고 거칠기만 했던 남편의 손은 지금까지 힘든 상황 속에서도 제 손을 절대 놓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쭈굴쭈굴 주름이 가득한 남편의 손이지만 제게는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따뜻한 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기회를 빌려 우리 가족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데 불편하고 남편은 말을 하는 데 불편하지만 이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나는 남편의 대변인이 되어주고, 남편 또한 나의 손과 발이 되어 줄 것이니, 그리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지금처럼 늘 그 자리에서 서로의 도움이 되어줄 것이라고…….

•우리 가정의 현재와 미래
우리 부부의 장애는 삶에 큰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불편한 제 손과 발은 남편이 대신해주고, 남편의 의사소통은 제가 대변인이 되어 대신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저의 남편이나 저만큼 서로에게 잘 맞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현재도 그렇고 미래도 그럴 것입니다. 남편은 본인 힘이 다할 때까지 제 손발이 되어준다고 말합니다. 저 또한 그렇습니다. 제 힘이 다하는 날까지 남편의 대변인이 되어줄 것입니다. 어쩌면 주변에서 저희를 보며 더 걱정스러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를 의지하며, 앞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우리 가정의 자랑
저와 남편이 아파 서로를 간호하며 의지한 지 약 10년이 다 되어 갑니다. 서로를 의지한 긴 시간 동안 우리 부부는 앞서서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필요한 것들을 척척 알아내는 것이 이제는 기본이 되어버렸습니다.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가 되었다 할까요? 우리가 다치기 전에 궁합이 100이었다면 지금은 200이 되었지요.
이제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서로 채워주는 만큼 남들이 생각하는 불편함보다 우리에겐 돈독함이 더 강해졌습니다. 자식들도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이제는 남편과 둘이 살면서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자랑거리가 있을까요?

•주변에서 말하는 우리 가정
우리 부부는 언제 어디서나 함께였습니다. 집 앞에 산책을 나갈 때도 시장에 장을 보러 갈 때도 항상 함께였죠. 어쩌다 저 혼자 나설 일이 있어 전동스쿠터를 타고 외출을 하게 되면 동네 친구들이 오늘은 왜 혼자 나왔냐고 물어보기 일쑤입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우리 부부가 그렇게 사이가 좋아 보이는가 싶어서 쑥스러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 시선에서도 항상 함께가 되어버린 것이죠. 사람들에게서 느껴졌던 측은함의 눈빛이 이제는 부러움의 눈빛이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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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 2019-05-22 10:28:21
모든 장애인분들의 귀감이 되신 두분에게 수상과 함께 영광 돌림니다.

정*자 2018-12-18 09:55:14
아 그자리에서 늘 그렇게 정말 부럽습니다. 그런 사랑이 있다는뎅; 놀라움을 금치 못합니다.
늘 행복하시기를 기도합니다.

박*희 2018-12-14 09:54:11
축하드립니다. 앞으로는 좋은 일만 있으실 거에요~ 건강하세요^^

윤*진 2018-11-29 08:14:06
절망의 순간 순간 가족의 사랑으로 이겨내신 두분께박수를보냅니다
아울러 귀한사연 수상하심을축하드립니다

이*성 2018-11-15 10:44:52
항상 긍정적으로 삶을 이끈 가정에게 앞으로도 응원합니다. 수상 축하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