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난극복의 현장 "행주산성" 탐방기
국난극복의 현장 "행주산성" 탐방기
  • 염민호 기자
  • 승인 2020.05.06 17: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상들을 통해 우측통행의 의미 새롭게 되새겨"
행주치마 유래를 남긴 임진왜란 3대 대첩 현장
지난 연휴 토요일에 고양시 한강변에 있는 행주산성에 올랐다. ⓒ소셜포커스

[소셜포커스 염민호 기자] = 지금은 많이 개선되었지만 공원이나 인도에서 좌측통행을 하는 사람들 때문에 의도하지 않게 부딪히거나 서로 멈칫거릴 때가 가끔 발생한다. 좌측통행은 일본제국주의가 우리나라에 남긴 것으로 반드시 버려야할 폐습이다. 사람이나 자동차나 배나 모두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일제치하의 교육을 받았거나 그 영향에 있었던 세대는 무의식적인 좌측통행을 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오른 쪽으로 걷는 것은 안정감 있고 편리하다. 누가 강조하지 않더라도 오른 쪽으로 걸어가고 오른 쪽으로 비켜주는 것이 정착되어야 한다. 대수롭지 않을지 몰라도 우측통행은 아주 중요한 생활예절이다.

지난 연휴 토요일에 고양시 한강변에 있는 행주산성에 올랐다. 행주산성은 여성들이 앞치마에 돌을 담아와 전투하는 장병들에게 공급했다는 유래를 남기고 있다. 포탄을 날리던 화약과 화살이 모두 소진되자 장정들은 손에 칼과 창을 움켜쥐고 토성을 기어오르는 적병을 베고 찔러 물리쳤다. 이 때 여성들이 앞치마에 담아 온 돌멩이는 효과적인 무기로 변신했다.

돌팔매질이 시작됐다. 장정들의 억센 손아귀를 떠난 돌덩이에 맞아 적병들이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이렇게 새벽부터 시작된 전투가 하루 종일 치열하게 계속되어 어두워진 밤까지 이어졌다. 왜군은 3만의 대병력이었다. 기록에는 왜군이 산성을 아홉 겹으로 둘러싸고 들이닥쳤다고 말하고 있다. 이 하루 동안에 왜군은 일 만 명의 사상자를 내고 물러갔다.

역사적인 승리를 이룬 까닭에 여성의 앞치마를 행주치마로 지칭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인들은 어디에서 그 많은 돌을 주워 날랐을까? 강변에 우뚝 솟은 야트막한 야산인데 돌산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의문점을 갖게 된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미리 강변에 내려가서 던지기에 좋은 몽돌을 수없이 주워 모아서 앞치마에 담아 날랐을지도 모르겠다. 과거의 전쟁은 칼과 창으로 찌르고 베는 참혹한 학살이 자행되는 근접전으로 마무리되기 마련이었다. 민•군이 합심하여 전투를 치러낼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기에 부녀자들도 손 놓고 전투를 지켜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행주산성은 3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입장할 수 있고 6시에 출입문을 닫는다. ⓒ소셜포커스
대첩문을 지나면 권율 장군 동상이 세워진 광장이 나온다. ⓒ소셜포커스

오래 전 고등학생 신분이었을 때… 정규 교과 과목에 교련이 들어 있었다. 제식훈련이나 총검술 훈련도 받고 M1 소총을 분해하고 조립하는 훈련도 했었다. 구급법이나 화생방 훈련 등 어지간한 기초 군사 훈련을 모두 소화했는데 봄가을 소풍을 행군훈련으로 대신하기도 했다.

어느 해 봄 소풍을 김포시 고촌에 있는 고촌초등학교 운동장에 모여서 행주산성까지 걸어간 기억이 있다. 들녘너머 마주 보이는 행주산성까지 농로를 따라 걷는데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듯 했다. 행주대교를 지나 산성에 도착하기까지 봄날의 땡볕도 만만치 않게 이글거렸다. 산 정상에 세워진 대첩비까지 올라가는 비탈길도 꽤나 가파르게 느껴졌던 기억이 잊히지 않고 떠올랐다.

수십 년이 지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정상을 향해 걷는데 경사도가 그다지 심하지 않은 것이다. 산성 내 수림이 울창하여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줄 뿐 아니라 공기도 맑고 좋았다. 전동 휠체어라면 장애인도 그리 어렵지 않게 정상까지 오를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산성 중간에 설치된 쉼터에는 고리던지기, 투호놀이 등을 할 수 있고 사진작품을 둘러볼 수도 있다. 어린 자녀들과 전통놀이를 하며 한판 승부를 펼치는 젊은 아빠들의 얼굴빛이 밝았다.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둘러보았다. 코로나19로 인해 내부를 관람할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충장사 뿐 아니라 모든 실내 전시관은 관람객 출입을 통제하고 있었다.

충장사 입구 안내판에 사당으로 출입하는 삼도삼문(三道三門)에 대한 설명을 읽어보았다. 궁궐이나 사당, 향교에서 볼 수 있는 삼도(三道)는 가운데 신(神)이 다니는 신도(神道)를 중심으로 좌우에 참도(參道)를 두는 것이 보편적이라 쓰여 있었다. 신도(神道)는 사당에 모셔진 신(神)이 다니는 길로 사람이 부득이 건너 지나갈 수밖에 없을 경우 머리를 숙여 예를 표해야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충장사 앞 삼문(三門) 역시 가운데 문은 사람은 출입할 수 없다. 사당에 들어갈 때는 삼문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서 나올 때는 왼쪽 문으로 나와야 한다. 들어갈 때나 나갈 때 모두 앞에 보이는 오른쪽 문으로 나가면 되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길을 오갈 때 항상 우측통행을 예법(禮法)으로 가르치고 생활화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행주산성에서 왜군과 싸웠던 조상들을 통해 우측통행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게 된다.

가족 쉼터와 시설물, 정상으로 올라가는 언덕길, 토성 및 권율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알려주는 이정표 ⓒ소셜포커스
충장사는 코로나19로 출입을 못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소셜포커스

당시 전라도순찰사였던 권율 장군은 금산 배티[梨峙]와 오산 독산성에서 왜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여세를 몰아 한양을 수복하고자 진지를 물색하는 중이었다. 서울 아현동 고개에 진을 치려했으나 조방장(助防將) 조경이 추천하는 행주산성으로 부대를 옮겼다. 바로 이곳이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 치러진 현장이다.

당시 왜군은 벽제관(碧蹄館, 현재 고양시 벽제역)에서 명나라 군대를 크게 물리치고 사기가 충천해 있는 상태였다. 왜군은 총대장 우키다(宇喜多秀家)가 지휘하는 3만여 병력을 7개부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으로 진군해 들어왔다. 1593년 2월 12일 동틀 무렵 새벽이었다.

당시 권율 장군은 휘하의 병력 가운데서 4천 명을 뽑아 시흥에 주둔하게 하고, 창의사(倡義使) 김천익(金千益)은 강화에서 해안을 따라 출전하도록 하는 등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권율 장군은 조방장 조경 및 승병장 처영과 함께 정예군 약 2천300명을 뽑아 행주산성에 도착해 서둘러 참호를 파고 목책을 쳐 수비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권율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군은 변이중이 만든 화차와 수차석포(水車石砲), 총통, 활, 재주머니 등을 총동원해 적군을 막아냈다. 하루해가 지고 어둠이 깔릴 무렵 왜군의 일곱 번째 부대가 공격해올 때는 무기조차 바닥나 투석전과 육박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마을 부녀자들이 모두 나서서 앞치마에 돌을 담아 날랐다. 큰 돌은 그대로 굴리고, 잔돌은 수차석포에 넣어 대포처럼 발사했다. 이 앞치마부대는 동요하던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워 왜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며 퇴각시키는 원동력이 됐다. 일본군은 행주산성 싸움에서 패한 후 다시는 한양(서울) 이북지역에 출병하지 못하고 철수를 서둘렀다.

행주산성에서 큰 승리를 거둔 공으로 권율 장군은 도원수가 됐다. 임진왜란이 끝난 뒤 조정에서는 권율 장군을 표창하고 원훈공신에 올렸으며 행주대첩비를 세워 공을 기렸다.

대첩기념관도
대첩기념관도 코로나19로 출입을 못한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소셜포커스
진강정은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야 만날 수 있다. 산성 밑으로 방화대교가 보인다. ⓒ소셜포커스

권율 장군이 왜군과의 결전을 위한 장소로 행주산성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행주는 삼국시대에 백제 땅으로 지명은 계백이었다. 고구려와 영토 전쟁을 벌일 때 한강 하구를 지키던 요충지였다. 고려 태조 23년에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덕양이라 했는데 행주(幸州)로도 불렸다. 이곳은 한강유역을 점유하려던 삼국시대의 각축장이었다. 지금도 산성 서북쪽에 신라시대 때 흙으로 쌓은 산성 터가 남아 있고,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 유물이 발견되었다.

산성의 둘레는 약 1천m 가량이며 전체 면적은 10만8천 평이다. 한강을 굽어보는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에도 바닷길을 통해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와 한양으로 가는 수상교통로였다. 조선시대에는 삼남지방에서 거둔 각종 세곡을 배에 실어 서해연안을 따라 조성된 항로를 따라 운송했다. 세곡을 실어 나르는 배가 강화도 앞 세어도에서 정박했다가 밀물 때를 맞춰 강화도와 김포반도 사이의 염하강에 진입해 조강(祖江)에 이르고 다시 한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었다.(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지점부터 강화도까지의 수로를 조강이라 부른다.)

비록 해발 125m 높이의 낮은 산이었지만 산성으로 오르는 경사가 가팔라서 방어전을 치르기에는 더 없이 좋은 장소였다. 특히 강 건너 김포평야를 비롯해 파주-고양-한양을 잇는 육상교통로를 모두 조망할 수 있다. 특히 숫자가 적은 군사력으로도 주요 교통로 통제가 가능했기에 권율 장군은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은 지역이라 간파했을 것이다.

산성 대첩비에 올라 바라본 주변 풍경(자유로와 한강 조망 / 영상교육관인 충의정 / 대첩비각) ⓒ소셜포커스

정상에 가까울수록 주변 경관이 시원하게 펼쳐진다. 정상에 오르기 전 오른쪽 돌계단으로 이어지는 내리막길로 내려가면 ‘진강정’이라는 정자가 나온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주변 경관은 이곳 산성이 여전히 교통 중심지 위에 서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도도하게 한강이 흐르고, 강변을 따라 자유로와 강 건너 올림픽대로가 펼쳐지고 수많은 차량이 질주하고 있다. 산성 발아래 놓인 방화대교를 통해서는 세계의 하늘로 이어지는 인천공항 고속도로가 이어진다.

대첩비가 서있는 정상 인근에도 장애인 휠체어가 들어갈 수 있는 화장실이 있다. 대첩비 바로 아래까지 관람객이 올라간다. 그러나 휠체어를 타고는 들어갈 수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산성 꼭대기 광장에는 ‘충의정’이라는 영상교육관이 서 있고 그 뒤편 북쪽 방향으로는 산성을 내려가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 이 계단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 과거 토성을 쌓아 올린 토성길이다. 장애인 휠체어는 산성 중간에 있는 쉼터에서 토성길 이정표를 보고 역으로 올라갈 수 있다.

산성 아래쪽 출구를 벗어나기 전, 왼편으로 내려가면 전통 국궁장이 있다. 이곳도 휠체어로는 들어갈 수 없다. 마지막 구간에 계단이 나오기 때문이다. 궁도장은 누각 2층에 사대가 있고 반대편 언덕에 과녁이 놓여 있다.

행주산성은 들어가는 출입문에서 대첩비가 있는 정상 광장에 이르기까지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이 대체적으로 잘 갖춰져 있다. 전동휠체어를 이용하면 한 바퀴 돌아보는데 별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행주산성은 3월 1일부터 10월 말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입장할 수 있고 6시에 출입문을 닫는다. 11월 1일부터 2월 말까지는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입장하고 5시에 문을 닫는다.

충의정 뒷편 계단을 통해 토성으로 내려갈 수 있다. 휠체어는 가족 쉼터에서 토성 방향으로 올라와야 한다. ⓒ소셜포커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