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비밀선거 보장하라"… 3년만에 '기각'
"장애인 비밀선거 보장하라"… 3년만에 '기각'
  • 박예지 기자
  • 승인 2020.05.28 0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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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외 타인은 꼭 2명 동반하라는 현행법은 사생활자유 침해"
헌재 재판관 6명 "마땅한 대안 없다"… 후진적 장애인 인권 의식 드러나
2017년 대선 당시 가족 외 타인이 기표를 보조할 경우 반드시 2인을 기표소 내부에 동반해야 한다는 선관위의 제지에 투표권을 포기한 중증장애인 정명호 씨가 공직선거법 제157조6항에 대한 헌법소원을 청구했다. 헌법재판소는 3년만에 '해당 법률은 중증장애인의 투표권을 충분히 보장하고 있으며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어렵다'며 27일 기각 판정을 내렸다. 청구인인 정명호 씨와 장애단체들은 재판소 앞에 모여 판결을 규탄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소셜포커스 

[소셜포커스 박예지 기자] = 중증장애인이 원하지 않는 타인에게 정치적 의사를 공개하게 하는 공직선거법에 대해 헌법재판소가 위헌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지난 2017년 제19대 대통령선거 당시 중증장애인 정명호 씨는 활동지원사 1명만 동반해 투표하겠다는 의사를 표시했다. 이에 인천광역시선거관리위원회는 공직선거법을 근거로 정명호 씨의 기표소 출입을 제지했다. 자신의 투표 내용을 활동지원사 외의 타인에게 공개하기를 거부한 정명호 씨는 결국 소중한 한 표를 포기해야만 했다.

선관위가 근거로 든 공직선거법 제157조 6항은 장애인의 기표지원을 위해 가족의 경우 1인, 가족이 아닌 경우 2명이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야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장애인의 투표권이 공정하게 행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조치다. 하지만 이 사건은 투표권자가 비밀선거의 원칙을 지키고자 자신의 투표 내용을 타인에게 공개하는 것을 거부한 사례이다.

이에 정명호 씨는 "해당 법 조항은 비밀선거의 원칙을 위반할뿐 아니라 장애인의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조항"이라며 헌법소원 심판을 청구했다. 투표보조가 필요한 장애인의 특성상 비밀선거의 원칙을 어느정도 예외로 하는 것은 인정하지만 투표 당사자의 의견을 묵살하는 것은 엄연한 기본권 침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3년을 기다린 끝에 돌아온 헌재의 응답은 '기각'이었다. 재판관 9중 6명이 위법이 아니라는 의사를 보였다. 현행 법은 중증장애인이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한 나름의 보완책이며 이외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는 것이다. 단 3명의 재판관이 청구인의 의견이 일리가 있다는 의견을 밝혔다.

(순서대로) 김재왕 변호사, 정명호 활동가, 문애린 서울장차연 상임대표, 박김영희 장추련 대표. ⓒ소셜포커스

27일 헌법소원 심판청구 선고 기자회견에는 청구 당사자인 정명호 씨를 비롯한 장애인 당사자들이 함께했다. 따가운 볕 아래서 기자회견을 준비하며 결과를 기다리던 이들은 헌재의 판결에 탄식을 금치 못했다. 이 날 회견에서는 김재왕 변호사, 정명호 활동가, 문애린 서울장차연 상임대표, 박김영희 장추련 대표가 발언했다.

시각장애인 당사자인 희망을만드는법 소속 김재왕 변호사는 "현재 공직선거법은 비밀선거 원칙을 필요 이상으로 침해하기에 소원을 청구했다"고 헌법소원의 요지를 밝혔다. 이어 "기표보조인이 가족이 아닌 경우 꼭 2명을 동반해야 하는 것은 가족과 함께 지내는 장애인과 그렇지 않은 장애인에 대한 차별이기도 하다"라며 현행법이 장애인의 자유로운 선거권 행사뿐만 아니라 장애인 사이에서도 차별을 만들어낸다는 의견을 밝혔다.

또 "본인의 내밀한 정치적 의사을 원하지 않는 타인에게 드러내게 만드는 것은 사생활의 자유를 침해하는 행위"라며 이와 같은 사례가 발생하는 것은 장애인 기표보조 대안이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사례의 당사자이자 인천민들레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정명호 씨는 "동등한 선거권을 갖는 성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취급을 받는 게 분통이 터진다"며 헌재 판결에 대한 강한 반발감을 드러냈다. 

서울장애인차별철폐연대 문애린 상임대표는 "국민을 위해 법을 만들고 시행하는 재판장들조차 아직까지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의식이 한참 모자르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장애인 투표권 보장을 위해 투쟁을 시작했던 시기를 회고했다. "투표소 편의시설조차 마련되지 않아 보장구를 이용하는 장애인들이 이용할 수 없었던 것이 이 투쟁의 시작이다"라며 "투쟁을 통해 장애인 투표 편의를 조금씩 보장받게 된 것처럼 힘차게 목소리를 내어 변화를 이끌어내겠다"며 투쟁 의지를 표명했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박김영희 대표도 한 목소리로 재판관들의 정체된 법 의식을 비판했다. "이어지는 투쟁에 우리나라 헌법재판관들의 의식이 너무 뒤떨어져 있는 것을 새삼 느낀다"면서 "투표 의사에 대한 비밀보장을 요구하는 게 뭐 그렇게 어려운 이야기라고 기각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소원 결과에 대해 강하게 비판했다. 이어 장애인의 인권 침해 사례를 한 차례 해프닝으로 치부하며 재발방지대책을 강구하지 않는 정부의 일관적인 관망의 태도 또한 꼬집었다.

헌법재판소 앞에 모인 장애인과 인권 운동가들은 장애인의 자기결정권을 침해하는 공직선거법을 개정하라고 다시 한 번 요구하면서 기자회견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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