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잊어서 미안해요..."
"당신을 잊어서 미안해요..."
  • 노승재 학생인턴기자
  • 승인 2020.06.11 18:0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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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리키에게... "Sorry, we missed you"
영화 '미안해요, 리키' 포스터

최근 거리에 배달 노동자들이 많아졌다. 딜리버리 서비스 인프라를 바탕으로 배달 서비스 플랫폼이 성장했기 때문이다. 알고리즘을 통한 최단 거리 계산, 간편화된 주문 및 수령 방식, 디지털화된 노동시간 관리 등 기술 발전의 혜택을 등에 업은 딜리버리 서비스는 무섭게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 뒷면에 그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배달 산업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그린 영화 ‘미안해요, 리키’에서 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프리랜서 배달 노동자로 일하는 리키 터너는 그 직업(프리)과는 달리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정해진 배달 수량을 처리하지 못한다면 아들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학교에 갈 수도 없고 화장실에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노동 중 괴한에게 습격을 당해도 미배달 물량에 대한 책임을 고스란히 지게 된다. 가족을 부양하기는커녕 어린 딸과 함께 분업해 일을 해야 하는 지경이다. 첨단 기술의 탈을 쓴 비인간적 노동환경 탓에 가정이 파괴되는 모습을 목격한 관객들의 표정은 어두울 수밖에 없다.

비극이 일어난 원인은 여러 가지로 꼽을 수 있다.

첫 번째 원인은 새로운 산업 환경에 적합하지않은 '노동법'을 들 수 있다. 공동체가 급변하는 산업 환경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장 우리나라에서도 배달 노동자의 법적 지위는 노동자와 고용자 그 사이 어딘가에 애매하게 위치해있으며, 후속논의가 진행 중이다.

공동체는 급변하는 환경에 맞춰 새로운 합의에 도달하고 갈등을 줄일 수 있다. 리키가 사는 영국 의회에서 적합한 노동법을 발의하고 가결한다면 말이다. 즉 급변하는 산업현장에 적절한 규칙을 제시하지 못한 것이 비극의 중요한 원인이라 볼 수 있다. 이 원인은 사회 규범적, 정치적 영역에 해당한다. 과연 이것 뿐일까? 

이번엔 더 근본적으로 '기술 발전' 문제에 접근해보자. 기술과 산업은 어떻게 발달하고 어떤 방향으로 성장하는가.

최근 현대 산업의 대명사가 된 ‘4차 산업혁명’의 화두 중 하나는 ‘연결’이다. 기술은 사물과 사물, 사람과 사물,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켰다.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특정 공간의 기기들은 하나의 운영체제를 공유할 수 있게 되었고, 배달 서비스 플랫폼이 발달해서 공급자와 수요자를 연결시켰다.

왜 연결하는 걸까? ‘단축을 통한 절약’을 위해서다. 사물과 사람의 기술적 연결은 특정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움직여야할 거리를 초 단위, 센티미터 단위로 단축시켜 시간과 공간을 절약한다. 시간과 공간이 절약될수록 우리는 더 가까워졌고 결과적으로 세계는 더 빠르게 움직였다. 우리는 4차 산업혁명 덕분에 더 빠르고 효율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됐다.

문제는 이 기술 혁명의 혜택이 고르지 못하다는 점이다. 누군가는 혜택의 명단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다. 일반적으로 기술은 '주류'라고 하는 다수의 편의를 위해 발달한다. 기술 발전을 위한 자본은 다수의 욕망이 모이는 곳에 몰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주류나 다수가 아닌 소수자를 위한 시장은 쉽게 성장하지 않는다.

일례로 시민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이동 서비스를 살펴보자. 공유 자전거와 공유 킥보드 플랫폼은 이용에 지장이 없는 비장애인을 바탕으로 성장했다. 반면 장애인 이동 서비스는 플랫폼은 커녕 기본적인 교통서비스인 저상버스 도입률 마저 형편없다.

국토부가 내놓은 2018년 저상버스 보급률 추정치는 전국 평균 25.3%이다. 장애인이 버스 한 대를 타기 위해 눈앞에서 3대를 그냥 보내야 한다는 뜻이다. 그나마 높은 서울의 도입률(44.4%, 2018 국토교통부 추정치)을 제외하고 보면 수치는 더 낮아진다.

저상버스 뿐만이 아니다. 서울시 장애인 콜택시 종합현황에 따르면 장애인 콜택시의 대기시간은 2018년 2월 기준 평균 53분(시간대별로 상이)이다. 나들이에 필요한 콜택시가 아니다. 진료와 재활 및 복지관 이용, 통학 통근 및 귀가 (총 72.5%)등 일상생활 영위에 필수적인 활동을 위해 이용한다. 앱을 켜면 몇 분 만에 바로 택시운전사와 연결되는 서비스와는 너무 비교되는 현실이다.

기술 발전은 빠르고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지만, 빠르고 효율적인 삶은 오직 주류의 세상에서만 가능했다. 4차 산업혁명의 연결은 역설적으로 '단절'을 낳은 것이다. 

연결에서 배제된 소수자들은 오히려 더 느려지고 뒤쳐질 뿐이다. 이것이 노동법을 개정하고, 숱한 사회적 합의를 거치더라도 어딘가에 존재하는 리키를 구제할 수 없는 이유다. 4차 산업혁명을 넘어 5차, 6차 산업혁명 역시 다수를 위해 진보할 것이기 때문이다.

슬프지만 어쩔 수 없는 기술 발전의 한계일까. 다행히도 다수의 편리함만을 좇는 기술 발전의 방향을 전환시키는 몇몇 사례들이 등장하고 있다.

수동 휠체어에 모터와 방향 조절 장치를 달아 전동휠체어처럼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파워 어시스트를 개발하는 소셜벤처 토도웍스, 실시간 자동 문자 통역으로 청각장애인의 ARS 인증 및 통화를 간편하게 해주는 앱을 만드는 소셜벤처 소보로 등이다. 우리는 이 작은 시도들에서 ‘기술 발전은 주류의 편의증진만을 좇는다’는 명제가 완전하지는 않다는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앞서 소개한 영화 ‘미안해요, 리키’의 원제는 ‘Sorry, we missed you’이다. 배달 노동자가 상품 배달을 미처 하지 못했을 때 고객에게 보내는 사과 카드에 적혀있는 문구다. 그러나 영화를 보는 우리 모두는, 그 말이 고객이 아닌 리키를 향한 말이라는 것을 안다. 질주하는 산업의 고삐를 살짝만 틀어 보호받지 못하는 배달 노동자, 혜택을 받지 못하는 장애인에게 말해보자.

"당신을 잊어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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