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기자가 간다④] 장애인의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 걷다
[박기자가 간다④] 장애인의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 걷다
  • 박지원 기자
  • 승인 2020.06.19 14:52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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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도전수조사 동행기 “장애인의 시선으로 걸어야 보이는 수많은 장애물들...”
볼라드 앞 점자블록 10~20%, 음향신호기 앞은 전무... 요철, 보도파손 등 위험성↑
가게와 노점상들 점자 블록에 가판대 놓아... 보도폭 80cm짜리 '가로수길'도 발견
음향신호기 2개가 서로 바껴있는 곳도 있어... 차 쌩쌩다니는데 "건너가세요"
시각장애인과 휠체어 장애인의 입장으로 다니는 길은 어떨까?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보이지않았던 수많은 장애물들이 보였다. 모니터링 요원 이상준씨, 오현석와 함께 보도전수 조사를 동행해봤다. ⓒ소셜포커스

[소셜포커스 박지원 기자] = 3년 전 신촌역 굴다리 앞... 패여있는 보도블록에 발이 걸려 넘어진 적이 있다. 그때 발목에서 났던 “우두둑” 소리를 잊을 수가 없다. 푹푹 찌는 더위에 깁스를 해야한다니... 날벼락같은 소식에 격앙된 목소리로 국토교통부에 전화를 걸었다. 돌아온 말은 “넘어진 건 본인 과실”이었다. 배상을 받으려면 아주 귀찮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했고, 자포자기하며 도로 포장이라도 제대로 보수해달라고 요청했다.

위 사례는 기자가 겪었던 실제 경험이다. 두 눈 멀쩡히 뜨고도 넘어진 스스로의 부주의를 탓해야했지만, 억울한 마음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특별히 이 사건을 끄집어낸 이유가 있다. 오늘 하루 단 몇 시간뿐이었지만, 시각장애인과 휠체어 장애인의 입장으로 거리를 다니면서 곳곳에 도사리는 수많은 장애물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지난달 25일부터 장애인편의증진기술지원센터 서울지부에서는 강남권 11개 구를 통틀어 보도 전수 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장애인 요원 1명과 비장애인 요원 1명이 짝이 되어 거리를 다니며, ▲보도상태 ▲보도장애물 ▲횡단보도 ▲말뚝 등 이동에 문제가 되는 모든 것을 찾아내고 있다. 장애인의 ‘눈’이 되고, ‘다리’가 되어 걷고 있는 모니터링 요원 이상준 씨, 오현석 씨와 함께 걸어봤다.

 

오늘 조사해야할 거리는 국회의사당 맞은편부터 샛강역까지 약 1.7km다. “금방 하겠는데?”라고 생각했지만, 천만의 말씀. 땡볕에 모자도 안 쓰고 걸으니 30분이 지나자 어질어질했다. 걸음을 떼고 2분도 채 걷지 않았는데, 장애물이 계속 나왔다.

바로 ‘보행 장애물’ 1위를 놓치지않는 ‘볼라드’(말뚝)였다. 원래 볼라드 30cm 앞에는 점자 블록이 있어야한다. 그래야 시각장애인이 인지하고 피해갈 수 있는데, 점자 블록이 있는 경우를 찾기가 여간 쉽지 않다. 차량이 보도로 침범하는 것을 막기위한 장치이지만, 휠체어 장애인에게도 불편하긴 마찬가지다.

(왼쪽) 점자블록이 없는 볼라드와 (오른쪽) 점자블록이 있는 볼라드의 모습. 점자블록이 있는 볼라드는 평균 10~20%에 불과하다. ⓒ소셜포커스

여의도 공원 앞에 다다르자 두 요원분이 갑자기 고개를 젓는다. “여기는 다 부적정이야” 비장애인의 눈으로는 잘 보이지가 않는다. 다시 보니 볼라드 앞에도 점자블록이 없고, 무엇보다 점자블록이 볼라드 앞 쪽에만 있어서 반대편에서 건너오는 시각장애인에겐 도움이 되지만, 나아가는 방향에 있는 보행자는 볼라드를 알기 어렵게 되어있다. 

빨간 네모칸에 점자블록이 있어야하지만 없다. 점자블록이 볼라드 앞쪽(횡단보도 방향)에만 있으니 건너편 시각장애인 보행자에게만 편리하게 되어있다. ⓒ소셜포커스

두 사람은 '환상의 콤비'답게 지혜롭게 역할을 분배했다. 현석씨가 부적정 설치물을 사진으로 찍고 줄자로 가로, 세로 넓이를 재서 알려주면, 상준씨는 설치물 위치를 지도상에 표시하고, 조사표에 적정/부정적 개수를 적는다.

상준씨가 볼라드의 앞글자 b를 따서 지도에 b1, b2로 위치와 순서를 표시한다. 오후에 센터에 가서 조사한 내용을 컴퓨터로 다 입력하려면 부지런히 순서대로 적어놔야한다.

현석씨가 사진을 찍고, 상준씨가 조사표에 기입하고 있다. ⓒ소셜포커스
(왼쪽) 기억하기 쉽도록 부적정 볼라드가 있던 위치를 지도상에 b1, b2로 적어 놨다. 
(오른쪽) 실태조사표에 적정, 부적정 볼라드 개수를 적고 있다. ⓒ소셜포커스

곧 신호등이 나온다. 자주 보아오던 음향 신호기인데, 눌러보니 작동이 잘 된다. 그런데 상준씨가 부정적 사례로 표시를 한다. 왜일까?

이것도 역시 음향신호기 앞에 점자 블록이 없다. 전수 조사를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가지만, 음향신호기 앞에 점자 블록이 있는 경우는 단 한 건도 없었다고 한다. 음향신호기 옆에 있는 나무도 횡단보도 진입로 한 가운데 있어 보행 장애물로 간주됐다.  

심지어 어떤 곳은 보도가 아닌 풀밭에 음향신호기가 있었다. 시각장애인은 어떻게 찾아가란 말인가... 음향신호기 밑에 휑하니 풀이 죽어있는 걸 보니 여러 사람이 밝고 간 흔적이 보인다.   

ⓒ소셜포커스
(왼쪽) 보행신호기가 보도가 아닌 풀밭 안에 있어 불편을 초래하고 있다.
(오른쪽) 횡단보도 진입로 한 가운데에 있는 나무도 대표적인 보행 장애물 중 하나다. ⓒ소셜포커스

당산역 사거리에는 음향신호기 2대가 한 곳에 설치되어있는데, 심지어 두 신호기의 방향이 바뀌어있었다. 왼쪽 것을 누르니 오른쪽 횡단보도로 건너가라는 음성이 나온다. 차가 쌩쌩 지나다니는데 건너가라니... 너무 위험해보인다.

요즘 같이 한창 더운 날에는, 신호등 앞에 있는 햇빛 가림막이 참 고마울 때가 많지만, 시각장애인에겐 불친절한 설치물이 된다. 대다수의 가림막이 음향신호기 앞에 위치하고 있어서 이용에 방해될 때가 많다. 

(왼쪽) 음향신호기 두 대가 한 곳에 설치되어있어 방향 안내에 혼란을 주고 있다.
(오른쪽) 햇빛 가림막이 대다수 음향신호기 앞에 위치하고 있어 이용에 방해가 될 때가 많다. ⓒ소셜포커스

공원을 지나자 바닥에 이상한 느낌을 감지했다. 보도가 불규칙하게 튀어나와있는 ‘보도 요철’이다. 나무 뿌리가 자라서 보도가 울퉁불퉁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도 보행 장애물 중 하나다.

보도가 심하게 패여있는 곳도 있다. 이건 뭐라고 칭하면 좋을까. 요철? 꺼짐? 파손? 바닥 지반이 전체적으로 꺼져있으니 ‘보도 요철’에 해당한다. 요철의 경우 일정 부분만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뜯어내야하기에, 가로ㆍ세로 넓이를 잴 때도 여유롭게 재야한다. 

길거리에서 자주 발견되는 '보도 요철'의 모습 ⓒ소셜포커스

가장자리에 보니 트렌치와 하수구 등이 보인다. 시각장애인은 보통 길 한복판으로 다니지 않는다. 위험하기도 하고, 혹시나 민폐가 될까하여 보통 길 가장자리로 다니는데, 트렌치나 맨홀 구멍이 많아 지팡이가 끼거나 휠체어 바퀴가 끼는 등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기도 한다.

(위) 트렌치, 맨홀, 환풍구는 시각장애인의 지팡이나 휠체어 바퀴가 빠질 수 있어 위험하다. 
(아래) 길 한복판에 소화전이 덩그러니 나와있어 보행에 장애가 된다. 지반이 꺼져있는 '보도 요철'도 보인다. ⓒ소셜포커스

점자블록이 이상하게 설치되어있는 곳도 많다. 점자블록을 따라서 가보면 바로 단차(계단)가 나온다. 정작 단차를 없앤 곳은 옆에 있다. 횡단보도 앞에 있는 단차와 트렌치는 서울시에서 2년 안에 보수할 계획이라고 하니 이번 조사에서는 넘어가기로 한다.

점자 블록을 따라가보니 단차가 나온다. 서울시에서 2년 안에 횡단보도를 보수할 계획이라하니 이번 조사에서는 넘어간다. ⓒ소셜포커스

점자 블록이 있어도 이용할 수 없는 경우도 많다. 신풍시장과 사러가시장 쪽에는 생선가게, 야채가게를 막론하고 점자블록을 다 막고 있었다. 심지어 점자 블록 위에 아에 가판대를 놓고 보이지도 않게 둔 곳도 많다. 시각장애인의 입장을 고려하지 못해 생겨난 불상사다.

구로디지털단지역과 신대방역 쪽에는 성인 한 명이 지나가기 어려울 정도의 좁은 길이 있다. 보행을 위해서는 보도폭 1.2m를 유지해야하지만, 이곳은 80cm도 채 안되어보였다. 길에 죄다 가로수를 심어놨는데, 휠체어 장애인이 지나가는 건 꿈도 못 꾼다. 이런 길들이 많을수록 휠체어는 차도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차도에서 휠체어 교통사고가 많은 이유다.

보다못한 상준씨가 “사람보다 가로수를 위하는 길이네”라며 이 곳을 ‘가로수길’이라 부르자며 우스갯소리를 던진다.

점자 블록을 막거나 아에 그 위에 가판대를 놓는 가게와 노점상이 많다. 시각장애인의 입장에서 생각하지 못하니 생겨난 불상사다. ⓒ소셜포커스
보행을 위해서는 보도폭을 최소 1.2m 이상 만들어야하지만, 가로수를 심느라 정작 성인 한 명이 겨우 지나갈 수 있게 되었다. 80cm도 채 안되어보인다. 보도에 잡다한 물건들을 올려놓아 휠체어 장애인은 지나갈 수도 없게 해놨다. ⓒ소셜포커스

날이 더워 아이스커피 한 잔을 하기로 한다. 두 사람은 어떻게 모니터링 요원을 하게 됐을까? 현석씨는 20살 때 사고로 양다리를 다치게 됐다. 당시에 “못 걸을 거다”라는 말을 들었고, 그 말이 너무 듣기 싫어 미친듯이 재활에 매진했다고 한다. 겉으로 봐서는 지체장애인이라는 걸 알기 어려울 정도로 걸음걸이가 자연스러웠다. 그의 피나는 노력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현석씨는 “장애가 있다보니 오래 걸으면 아직 다리가 불편하긴해요. 그래서 저희 어머니 집이 1km(10분) 거리인데 애들 데려갈 때도 꼭 차를 타고 다니거든요. 걸을 일이 잘 없으니까 몰랐는데, 시각장애인의 눈으로 보니 불편한 게 정말 많더라구요. 새로 생긴 도로는 잘 해놓은 곳이 많은데, 아직까지 구(舊) 도로는 불편한 것이 많아요. 조사를 통해서 하루빨리 장애인들의 이동 편의가 좋아졌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지역 주민으로 우연히 모집 공고를 보게 된 상준씨는 하루 교육 몇 시간을 받았지만, 베테랑같은 모습이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물으니 "헷갈릴 때는 매뉴얼을 잠깐씩 보기도 하고, 장애인의 입장에서 임하다보니 안 보이던 것들이 점차 보이기 시작했어요"라고 말한다. 

(왼쪽) 아파트 사유지로 보이는 곳에 맨홀이 튀어나와있다. 사유지에 있어서 조사대상에서 제외된다.
(오른쪽) 버스정류장과 의자 사이의 보도폭이 1.2m가 넘는지 줄자로 재고 있다. ⓒ소셜포커스

지나가다보니 버스 정류장 때문에 보도폭이 좁은 곳이 있어 줄자로 재기도 하고, 아파트 사유지에 튀어나와있는 맨홀도 발견했다. 사유지의 경우 조사에 제외되는 부분이라 넘어가지만, 만약 누군가 민원을 넣어서 시청에서 권고 조치를 내려도, 소유자가 바꿀 의지가 없다면 소용없는 일이니 안타까웠다.  

샛강역에 이르러서야 오늘의 조사가 마무리 됐다. 이제 센터에 들어가서 조사 내용을 적을 일만 남았다. 함께한지 4주밖에 안 됐지만 형님, 동생하며 정이 들었는지, 어느새 상준씨의 걸음걸이가 현우씨의 보폭과 비슷해졌다. 두 사람이 걸어가는 길마다 장애인도 쉽게 다닐 수 있는 길이 만들어지길 응원하며 아쉬운 인사를 나눴다. 

'환상의 콤비'를 자랑하는 두 사람은 형님, 동생하며 정이 들었나보다. 어느새 걸음거리와 보폭마저 비슷해졌다. ⓒ소셜포커스
'환상의 콤비'를 자랑하는 두 사람은 형님, 동생하며 정이 들었나보다. 어느새 걸음거리와 보폭마저 비슷해졌다.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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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 2020-06-19 16:00:00
박기자님 기사 기다리고있었습니다!!
비장애인의 입장에서는 안전이나 미관을 위한 설치물들이 장애인분들에게는 큰 위험요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 참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그래도 장애인분들을 위해 환경개선을 위해 모니터링요원님들도 계시고, 도로의 현황들을 기자님께서 취재해주시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앞으로도비장애인과 장애인분들이 상생할 수 있는 환경이 빠르게 왔으면 좋겠어요!!! 저도 앞으로는 도로를 다니면서 장애인분들의 시각으로 좀 더 볼 수 있게 될 것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박*원 2020-06-19 18:38:54
박기자 시리즈를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취재를 하면서 알아가는 것들이 많아져서 재밌게 취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관심과 제보 부탁드립니다!^^

류*용 2020-06-23 23:22:16
항상 좋은기사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