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정한 이타주의자, 뜨거운 이타주의자
냉정한 이타주의자, 뜨거운 이타주의자
  • 노승재 학생인턴기자
  • 승인 2020.08.03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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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와 이성만으로 사회적 가치 재단할 수 없어
인권은 다양한 해석 가능성 가지고 있어야...

‘냉정한 이타주의자’의 저자 윌리엄 맥어스킬은 남을 도우려는 조급한 열정이 위험할 수 있음을 지적한다. 가령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는 재단에 기부할 때, 어떤 재단은 기부 금액 대비 효과가 큰 반면 다른 재단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만약 동정심을 유발하는 마케팅 전략에 마음이 움직여 비효율적인 재단에 기부할 경우 사회 총효용은 낭비될 수 있다고 맥어스킬은 주장한다.

뿐만 아니다. 그는 비효율적인 사회 활동에 몸 담는 것보다 그 시간에 생산성 높은 일에 몰두해 얻은 돈을 기부하는 것이 더 좋은 사회를 만드는 효율적인 방법이라고도 주장한다. 타당하고 빈틈없는 논리지만 왠지 찜찜한 기분이 든다.

이 찜찜함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정말 사회적 가치를 냉정한 논리와 이성의 영역으로만 평가할 수 있을까? 기부금이 비효율적으로 사용되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작가 나름의 해결책임을 모르지는 않지만 ‘냉정한 이타주의자’만이 존재하는 세상을 상상해본다면 고개를 젓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냉정한 이타주의자만'이 살고 있는 세계를 상상해보자. 그 곳에서는 선의의 중요성이 간과되기 쉽다. 작가가 지적한 대로 선의와 열정만으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 그러나 선의가 없다고 사회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비용 대비 효과’를 따지지 않는 열정이 여러 사회 단체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열정은 다양한 가치와 사회활동을 낳는 동력이 된다. 냉정함만으로는 사회 활동의 폭과 범위가 넓어질 수 없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공리주의적 입장에서 사회적 가치를 판단하면 자칫 추상성이 높은 사회적 가치의 의미를 납작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인권’이다. 인권을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인권을 해석하는 방법은 역사적으로 변화해왔고 그 개념 또한 다층적인 폭을 가지고 있다.

인권을 정의하는 것조차 어려운 현실이라면 한 집단의 인권과 다른 집단의 인권을 증진시키는 선택이 대립할 때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평가해야 할까.

가령 아프리카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설립하는 재단과 장애인 이동ㆍ편의시설을 지원하는 단체 중 한 곳에만 기부해야 한다면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선택해야 하는가.

과연 맥어스킬이 제시하는 바대로 단순히 사람 수에 그들 각각의 효용을 곱하는 것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조금 비효율적이더라도 오히려 인권이 다원적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치열하게 토론할 수 있는 해석의 장을 마련하는게 좋지 않을까?

공리주의적 관점은 의도치 않게 계산 과정에서 사회적 가치를 앙상하게 만든다. 인권은 오히려 다양한 맥락에서 해석될 가능성을 포함해야 한다. 우리가 인권을 포함한 다양한 사회적 가치 앞에서는 뜨거워져야 하는 이유다.

지금도 인권은 세계인권선언, 헌법 등 조문 형태로 표현되어 있는 개념의 범위를 넘어 끊임없이 진화하고 있다. 그 범위가 넓어지고 복잡해질수록 세상이 인권을 어떻게 침해하는지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변화하는 세상은 법이 포함하지 않는 영역에서 새롭게 또 집요하게 인간의 존엄성을 위협하기 때문이다.

'냉정한 이타주의자'와 함께 우리에게는 '뜨거운 이타주의자'도 필요하다. 냉정한 계산 과정이 미처 포착하지 못한 인권의 사각지대를 발견하고 뜨거운 가슴으로 사각지대를 해소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그런 이타주의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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