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장애인복지, 현대와 세계를 뛰어넘었다
조선시대 장애인복지, 현대와 세계를 뛰어넘었다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0.08.28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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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노약자 복지는 조선의 건국이념에도 나타나
조선왕조실록, 장애인복지 100회 이상 생생하게 기록
장애인은 지위를 묻지 말고 우대하여 긍휼하라
엘리자베스구빈법보다 200년 앞서고 훨씬 고차원

얼마 전 어느 대학 교수로부터 장애인복지에 관한 강의를 들었다. 그 분은 장애인복지제도의 근원을 설명하면서 1601년 영국에서 시행한 엘리자베스구빈법을 소개하였다.

필자는 아주 오래 전에도 어느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공부하면서 사회복지의 역사에 관한 강의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강의했던 교수도 역시 엘리자베스구빈법이 체계화된 사회복지제도의 효시라고 설명했다.

다수의 사회보장론이나 사회복지론의 교재에도 이러한 내용은 자주 등장한다. 엘리자베스구빈법이 서구 자본주의 시작과 근대국가 형성과정에서 사회복지제도를 도입하는데 어느정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엘리자베스구빈법은 빈민구제, 취로의 강제, 부랑자의 정리를 목적으로 한 것이며, 기본적으로 빈민에 대한 억압과 통제의 성격이 강했다. 시민권을 기반으로 하는 현대적 사회보장 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이때의 구빈법에 따르면 빈민관리를 위한 치안판사와 빈민감독관을 두었다. 치안의 관점에서 접근한 것이다. 구빈세를 도입하고, 빈민을 노동력 유무에 따라 구분하였다.

노동능력이 있는 자는 작업장에 일하게 되고, 이주의 자유가 없었으며, 노역을 거부하면 감옥에 보내어 부랑생활을 금지했다. 일자리가 없어서 못하는 경우에도 감옥생활을 해야 했다.

그리고 노동능력이 없는 빈민, 병자, 노령자, 장애인 등은 수용시설에서 보호를 받았다. 또한 빈민 아동들은 도제수습을 받거나 고아원에 수용되었다.

장애인 복지라는 별도의 개념은 없었고, 빈민관리에 포함되었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역사에서 장애인 복지제도는 어떠했을까?

엘리자베스구빈법보다 수백년 앞서 우리의 역사에는 훨씬 높은 차원의 장애인복지가 시행되었다. 이벤트성 복지가 아닌 법령으로 제도화 되었다.

조선시대 생생한 역사기록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현대적 개념을 뛰어넘을 정도의 장애인 복지제도가 시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에 고구려의 진대법이나 고려시대 의창제도 등 조선 이전에도 복지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는 백성이 어려울 때 곡식을 빌려주는 정도이고, 진정한 의미의 복지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선시대에는 오늘날 흔히 소외계층이라고 말하는 사회복지 제도의 수혜대상자를 기록할 때 환과고독(鰥寡孤獨)과 폐질인(廢疾人)라고 표현했다.

환과고독은 홀아비, 과부, 고아, 무의탁 노인을 총칭하는 것이고, 폐질자는 장애인을 말한다.

늙어서 아내 없는 것을 환(鰥), 늙어서 남편 없는 것을 과(寡), 어려서 부모 없는 것을 고(孤), 늙어서 자식 없는 것을 독(獨)이라 했다.

장애인은 폐질인(廢疾人)이라 했고, 잔질인(殘疾人)이라고 쓰기도 했다. 중국에서는 현재에도 장애인의 공식명칭이 残疾人[cánjírén], 즉 잔질인이다.

폐질인은 더 이상 고칠 수 없는 병이라는 뜻으로 질병의 후유증으로 신체 기능의 일부가 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잔질인 또한 질병의 후유증으로 인식하는 개념이다. 둘다 장애의 현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표현이며, 장애인을 비하하거나 능력결함의 의미는 들어있지 않은 순수한 표현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장애인(障碍人)은 한자어임에도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다. 막혀있고 거리끼는 사람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인가? 장애물(障碍物)에서 物자가 人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handicap이나 disabled 같은 영어 표기에서도 능력결함의 의미가 들어있다.

오히려 우리 조상들이 썼던 폐질인이나 잔질인이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 아닐까?

조선 말기에 해당하는 고종실록에서도 장애인을 폐질·잔질인이라고 표기했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장해자(障害者)가 되었고, 오늘날 장애인으로 진화되었다.

장애인의 명칭도 그렇지만 문제는 장애인복지제도의 내용이다.

조선은 건국하면서부터 무의탁 노인·고아 및 장애인 등 소외계층에 대한 복지문제를 건국이념의 하나로 삼았다. 태조 이성계는 즉위교서에서 노약자를 돌보는 것은 왕정이 먼저 할 바이므로 구휼하고 부역을 면제하겠다고 밝혔다. 태조실록 1392년 7월 28일자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장애인 문제가 처음을 등장한 것은 태조실록의 태조2년(1393년) 4월 19일이다. 조선을 건국한 다음 해의 일이다.

“ 환과고독과 늙고 쇠약하며 폐질 등으로 가난하여, 스스로 생존하지 못할 사람은 잡다한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불쌍히 여겨 구휼(救恤)하게 할 것이며, …”

원문은 이렇다. 鰥寡孤獨、老弱廢疾等, 貧乏不能自存者, 蠲免雜泛徭役存恤.

엘리자베스구빈법보다 208년이나 앞서 일어난 일이다.

그리고 태조7년(1398년)에는 이런 기록도 있다.

“폐질이 있어 능히 스스로 살아가지 못하는 사람은, 지위의 높고 낮은 것을 묻지 않고 잡역을 면제하고 우대하여 긍휼(矜恤)할 것이며, … ”

“장애인은 지위를 묻지 말고 우대하여 긍휼하라”

격리와 통제를 목적으로 도입했던 영국의 엘리자베스구빈법과는 차원이 다르다.

세계 최초의 사회보장법은 1601년의 엘리자베스구빈법이 아니라, 1393년의 조선태조구휼법으로 보는 것은 어떨까?

정종실록의 정종2년(1400년) 7월 2일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환과고독·노유(老幼)·폐질자 가운데 산업이 있어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자를 제외하고, 궁하여 스스로 생존할 수 없는 자는 소재지 관사에서 우대하여 진휼 구제하여 살 곳을 잃지 말게 하라”

실록에는 폐질이 172회, 잔질이 85회 등장한다. 대부분 구휼문제나 권리구제와 관련된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실록은 역시 애민정치의 아이콘 세종실록이다. 37회 나온다.

세종실록 세종8년(1426) 7월 18일 기록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예조에 전지하기를 "노유자와 폐질자를 인애(仁愛)로써 대하라는 이미 세운 법령이 있는데도 관리들이 이를 소홀히 하여 거행하지 않으니, 그 양로조건을 의정부와 제조(諸曹)가 함께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

법제화 된 장애인 복지정책을 소홀히 하는 관료들을 질책하고, 개선방안을 마련하려는 세종대왕의 의지가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장애인 복지가 이벤트성이 아니라 법제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애인을 인정과 사랑으로 대하라는 당시 법령의 취지는 오늘날 걸핏하면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구설수에 오르는 정치 지도자들이 새겨야 할 덕목이다. 최근에는 여당 대표가 장애인 비하 발언으로 국가인권위원회로부터 시정권고까지 받았다.

장애인복지에 대해서 기록한 태조실록(왼쪽)과 세종실록(오른쪽)
장애인복지에 대해서 기록한 태조실록(왼쪽)과 세종실록(오른쪽)

다음은 세종 13년에 있었던 일이다.

형조에서 김척을 목 베려 하니, 그 어미가 "제 나이 80이 넘었는데, 자식이 셋이 있으나, 하나는 폐질이고, 하나는 두 눈이 멀었습니다. 다만 척에게 의지하여 살았는데, 형벌을 받는다면 늙은 계집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참인지 거짓인지 사실을 조사하는 동안에는 아직 형벌을 시행하지 말라."고 했다.

사형수에게도 노약자·장애인 가정을 돌봐야 하는 경우에는 배려하려는 의지가 엿보인다.

세조2년(1456년)에 있었던 모반에 연루된 자들의 처벌에 관한 규정을 보자.

“80세 이상의 남자와 60세 이상의 여자, 그리고 폐질자는 모두 연좌죄(緣坐罪)를 면제하고, 백숙(伯叔)·형제의 아들은 호적의 이동에 관계없이 모두 3천리 밖으로 귀양 보내어 안치하고, …”

모반죄에 연루되면 3족이나 9족을 멸할 만큼 연좌제가 확실했던 시대, 그러나 노약자·장애인에게는 이러한 배려가 있었다.

1457년 9월 16일자 세조실록은 왕이 예조에 다음과 같은 전지를 내리고 해당 관사에 시달하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잔질(殘疾)·독질(篤疾; 병으로 위독한 사람)로서 더욱 의탁할 곳이 없는 자와 맹인(盲人)을 위해서는 이미 명통사를 설립하였고, 농아(聾啞)와 건벽(蹇躄;하지장애) 등의 무리는 한성부로 하여금 널리 보수를 찾고, 동·서 활인원에서 후히 구휼하되, 매 계절마다 계문하게 하라.

조선의 장애인복지가 무상시혜로만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명통사와 같은 장애인 단체를 세우고, 여기에 장애인만을 위한 일거리를 제공하면서 자립활동을 지원하기도 했다. 장애인만을 위한 벼슬자리도 마련해 주었다. 관리를 임용하는데도 편견이 없었다. 장애인이 판서 이상의 고위직에 오른 사람도 많았다.

조선시대 최악의 폭군이었던 연산군도 장애인·노약자에게는 소홀히 하지 않았다. 연산군일기 1502년 11월 27일자 기록이다.

"금년의 흉년은 중외가 한결같으니, 흉년에 대비하는 정사를 마땅히 서둘러야 하겠다. 그 가운데도 환과고독이나 폐질자로서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먼저 진휼하라."

장애인에게 구휼이 필요할 때는 가장 먼저하고, 죄를 물을 때는 가장 관대한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실록을 검색하는 동안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조선의 장애인복지는 세계를 뛰어넘고 현대를 뛰어넘었다.

학자들이 사회복지사를 연구하면서 서구의 자료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이러한 자랑스러운 역사를 국제학회나 학술지 등을 통해서 외국에도 자주 알렸으면 좋겠다.

자애유형별 복지대책을 설명한 세조실록(왼쪽)과 흉년에 대비하여 장애인과 무의탁자를 먼저 지원하라는 교지가 들어있는 연산군일기(오른쪽)
장애유형별 복지대책을 설명한 세조실록(왼쪽)과 흉년에 대비하여 장애인과 무의탁자를 먼저 지원하라는 교지가 들어있는 연산군일기(오른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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