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들의 얼이 숨쉬는 효창공원 (상)
독립투사들의 얼이 숨쉬는 효창공원 (상)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1.03.02 11:3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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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실 묘지, 청일전쟁 이후 일본군 주둔하며 수난 시작
일제가 유린했던 곳, 해방 후 애국선열들의 숨결로 다시 태어나
윤봉길 등 독립 의열사 유해 봉환하여 호국의 성지로 자리 잡아
지형상 문제점 불구하고 묘역마다 이동약자 접근시설 돋보여

3·1절을 하루 앞두고 항일독립운동으로 순국하신 선열들의 얼이 숨 쉬는 효창공원을 방문했다. 효창공원은 김구 선생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관련된 인사들의 묘지가 있다. 3·1운동은 임시정부 수립에 큰 영향을 끼쳤다.

서울 시내 한복판 용산구 효창동에 자리한 효창공원의 원래 이름은 효창원이었다.

옛날에 이곳엔 어린 나이에 숨진 정조대왕의 큰 아들 문효세자와 그의 어머니 의빈 성씨의 묘가 있었다. 문효세자가 5살에 홍역으로 창덕궁에서 사망하고, 같은 해에 그의 어머니인 의빈 성씨도 세상을 떠나 모자가 함께 이곳에 묻혔다. 그리고 나중에는 다른 왕족들의 묘도 생겨났다.

효창(孝昌)은 문효세자의 효(孝)자와 창덕궁의 창(昌)자에서 유래한다. 원(園)은 왕의 직계가족의 묘를 말한다. 왕의 무덤을 능(陵)이라고 하는데 반해, 세자나 원손, 왕의 생부 생모 등 직계 가족의 무덤을 원이라고 한다. 왕족이라도 여기에 속하지 않으면 그냥 묘(墓)라고 부른다.

울창한 소나무와 밤나무 숲으로 아름다운 경관을 자랑했던 효창원은 1894년 청일전쟁 때 일본군 부대가 인근에 불법 주둔하면서부터 그 가치와 의미가 훼손되기 시작했다.

그 후 조선 국권을 피탈한 일제는 효창원의 숲을 파헤쳐 골프장을 만들었다. 효창원의 일부에 유원지가 조성되었고, 일제의 기념물들이 하나씩 들어섰다. 급기야 일제는 1945년에 효창원에 있던 왕실의 묘를 모두 다른 곳으로 강제 이장하고, 효창공원으로 바꾸었다. 그러고 나서 불과 몇 달 후에 결국 일제는 패망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공원은 우리 손에 돌아왔지만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며, 서울시는 이질적인 시설들을 정비하고 독립운동 기념공원으로 재단장을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일절을 앞두고 태극기로 장식된 효창공원 앞 Ⓒ소셜포커스
삼일절을 앞두고 태극기로 장식된 효창공원 앞 Ⓒ소셜포커스
효창공원 정문 Ⓒ소셜포커스
효창공원 정문 Ⓒ소셜포커스
공원관리사무소 Ⓒ소셜포커스
공원관리사무소 Ⓒ소셜포커스
전통양식의 담장과 소나무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가꾸어진 공원 탐방로 Ⓒ소셜포커스
전통양식의 담장과 소나무숲 사이로 산책로가 잘 가꾸어진 공원 탐방로 Ⓒ소셜포커스
이질적인 시설물이 혼재한 공원 현황, 서울시는 이에 대한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사진=서울시 자료)
이질적인 시설물이 혼재한 공원 현황, 서울시는 이에 대한 정비를 추진하고 있다.(사진=서울시 자료)

1945년, 고난과 시련의 역사가 끝나는 듯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이했다. 중국에서 돌아온 백범 김구 선생은 함께 독립운동을 하다가 타국에서 순국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셔오는 일부터 서둘렀다. 1946년 유해 송환과 함께 국민장을 치르고 효창공원에 안장했다.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의 이러한 노력으로 독립운동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공간으로 새로 태어났다. 일제가 유린했던 그 역사적 공간은 순국선열들의 숨결과 함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이다. 세 의사가 잠든 곳을 ‘삼의사 묘역’이라 한다.

이어 1948년 9월에는 중국 땅에서 순국한 임시정부의 주석 이동녕 선생과 국무원 비서장 차리석 선생, 환국 후 서거한 군무부장 조성환 선생의 유해를 안장했다.

그러나 이듬해 6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김구 선생이 민족통일을 못 이룬 한을 안고 다른 사람도 아닌 같은 민족의 흉탄에 쓰러진 것이다. 국민들의 충격과 애도 속에 국민장이 치러졌다. 그리고 앞서간 3인의 의사, 3인의 임시정부 요인과 함께 자연스럽게 이곳에 모시게 되었다.

공원의 중앙부에는 가장 먼저 조성된 삼의사 묘역이 있고, 서쪽으로 150m 거리에 김구선생 묘역, 동남쪽으로 150m 거리에 임정요인들의 묘가 있다.

‘삼의사’가 국민장과 함께 이곳에 모셔지는 과정이 김구 선생이 남긴 자서전 “백범일지”에 잘 나와 있다.

나는 즉시로 일본에 체류하고 있던 박열(朴烈) 동지에게 부탁하여 조국 광복에 몸을 바쳐 무도한 왜적에게 각각 학살을 당한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3열사의 유골을 환국시키게 하고 국내에서 장례 준비를 진행하였다. 그러던 중 ‘유골이 부산에 도착하였다’는 기별을 듣고, 영접 차 특별열차를 타고 부산을 향하였다. 세 열사의 말 없는 개선에 유골 봉환식을 거행하고, 영구를 서울로 봉환하기 위해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부산역 앞에서 서울까지 각 역전마다 사회단체와 교육기관은 물론이고, 일반 인사들까지 운집·도열하여 추도식을 거행하니, 산천초목도 슬퍼하는 듯 감개무량하였다. 서울 도착 즉시 영구를 태고사(太古寺)에 봉안하고, 유지 동포들은 누구를 가릴 것 없이 경의를 표할 수 있게 하였다. 장례에 임하여 봉장위원회(奉葬委員會) 책임자들이 장지를 널리 구하였으나 여의치 못하여, 결국 내가 직접 잡아놓은 용산 효창원 안에 매장하였다. (백범일지)

김구 선생은 자신의 지령으로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쳤던 윤봉길 이봉창 의사의 유해를 직접 봉환하고 장례를 치르면서 느꼈을 감회는 어떠했을까?

필자는 삼일절을 맞아 독립운동으로 순국한 선열들의 묘지에 일일이 참배를 하고 싶었다.

공원 내 각 묘역은 둔덕(가운데가 솟아서 불룩하게 언덕이 진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묘역 입구에서 많은 계단을 통해 묘지까지 올라가야 한다. 다른 공원들에서도 역사 인물의 묘지나 동상 등 현충시설은 대부분 그런 모습이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등 이동약자는 접근할 수 없어, 경배가 아닌 원망을 안고 멀리서 바라만 보다 돌아서는 경우가 많다.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필자도 수없이 겪어왔던 일이다.

그러나 이 공원은 좀 달랐다. 입구의 계단통로와 별도로, 묘역 옆으로 우회하여 묘지까지 접근할 수 있도록 이동약자용 경사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모두 100m가 넘는 제법 먼 거리이지만, 완만한 경사로가 묘지 바로 앞까지 연결되어 있었다.

다만 여기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각 묘역의 주출입구에서 묘지를 바라보면 계단통로만 보이고, 다른 통로에 대한 안내가 없다. 따라서 이동약자는 우회 경사로가 없는 줄 알고 접근을 아예 포기해버리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주출입구 옆에 이동약자용 우회 경사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안내 표식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다.

삼의사 묘역부터 방문했다. 세 기가 아닌 네 기의 묘지가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다. 왼쪽부터 안중근 의사, 이봉창 의사, 윤봉길 의사, 백정기 의사 순이다.

묘단 아래에는 ‘遺芳百世(유방백세)’라는 네 글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꽃다운 이름이 후세에 길이 남다”는 뜻이다. 이 글자는 오른쪽부터 띄엄띄엄 돌 하나에 한 글자씩 새겨져 있다. 왼쪽부터 읽기에 익숙해진 요즘 사람들은 세백방유(世百芳遺)로 잘못 읽을 가능성이 높다. 필자 역시 처음에 그렇게 읽고 나서 “이게 무슨 뜻이지?”하고 궁금해 한 적이 있다. 여기서 백세는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를 1세로 하여 100회를 반복하는 것이니 수 천 년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안중근 의사의 묘는 나중에 유해를 찾아 봉환해오면 모실 가묘이다. 따라서 ‘삼의사’라 함은 안중근 의사를 빼고 말한다. 안중근 의사 묘도 삼의사의 묘와 같은 장소, 같은 모습 나란히 자리 잡고 있다. 이미 네 분의 묘역으로 완성되어 있다면 ‘사의사 묘역’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을까?

안중근 의사의 유해를 찾기 위해 발굴조사 등 많은 노력을 했지만 찾지 못했다. 안 의사 순국 당시 일제는 중국의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집행하고 감옥 뒤에 표식도 없이 묻어버렸다. 유기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시신이 유족들에게 돌아가고 묘지가 생기면 독립운동의 성지가 될 것을 우려한 간교한 조치가 아니었는가 싶다. 안중근 의사가 묻히고 110년이 지났다. 매장지로 추정되는 곳은 이제 아파트가 들어섰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유해를 모셔올 가능성은 더욱 희박해졌다.

유해보다는 안중근 의사의 정신과 상징성이 더 의미가 있다고 본다. 네 분의 업적에 차등을 두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은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가장 인상적으로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굳이 안중근 의사를 제외하여 ‘삼의사 묘역’이라고 할 필요가 있을까? 꼭 유해가 돌아와야만 의사 대접을 할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냥 가묘로 두기가 뭐하다면 상징물이라도 넣어두면 어떨까?

필자가 공원관리사무소에 문의 사항이 있어 찾아갔는데, 그 시간에 나이 지긋한 노신사 두 분이 방문하였다. 한 분은 재단법인 대한민국꽃무궁화국제재단 백일환 연구원장(전 사단법인 무궁화총연합회 회장)이라고 했다. 방문 목적은 ‘삼의사 묘역’의 명칭을 ‘사의사 묘역’으로 바꾸어 주면 좋겠다는 건의를 하러 왔다는 것이다. 이유를 설명하면서 “자주 이곳을 찾아오는데,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고 했다. 이에 필자도 “저도 그런 생각을 했는데요”하고 거들었다.

삼의사 묘역의 입구와 장애인용 통로 Ⓒ소셜포커스
삼의사 묘역의 입구와 장애인용 통로 Ⓒ소셜포커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지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 Ⓒ소셜포커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묘지와 안중근 의사의 가묘가 있는 삼의사 묘역 Ⓒ소셜포커스
임정요인 묘역 입구와 이동영 차리석 조성환의 묘지 Ⓒ소셜포커스
임정요인 묘역 입구와 이동영 차리석 조성환의 묘지 Ⓒ소셜포커스
백범 김구 선생 묘지와 묘역의 주입구 및 장애인 통로 Ⓒ소셜포커스
백범 김구 선생 묘지와 묘역의 주입구 및 장애인 통로 Ⓒ소셜포커스

‘삼의사’의 한 사람인 매헌 윤봉길 의사는 1908년 충남 예산 태생이며, 고향에서 계몽운동을 하다가 23살에 중국으로 망명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 선생을 만나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1932년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리는 일본의 일왕탄생일 겸 승전축하 행사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 파견군 사령관인 시라카와 대장을 폭살하고, 일본 고위 관료들에게 큰 부상을 입혀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다. 이 사건 이후 중국의 국민당 정부도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원을 약속했다. 윤봉길 의사는 그 해 12월 19일 일본의 가나자와 형무소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했다. 서울 서초구 매헌로 “양재시민의숲” 공원 안에 그의 기념관이 있다. 충남 예산군 덕산면의 생가 유적지에도 기념관이 있다.

이봉창 의사는 1901년 서울 용산에서 태어났으며 지금의 효창공원이 있는 효창동에서 살았다. 1931년 중국에 망명하여 김구 선생을 찾아갔다. 김구 선생으로부터 일왕 암살 임무를 부여받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2년(윤봉길 의사의 의거일과 같은 해임) 일왕의 행차에 수류탄을 던졌으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었고, 1932년 10월 10일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순국했다. 공원에서 불과 수백 미터 거리에 그의 집터와 기념시설이 있다.

구파 백정기 의사는 1896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으며, 1919년 3·1운동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의 뜻을 세웠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일본제국주의 해체운동을 할 목적으로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 주중 일본대사를 습격하려다 실패하고 투옥되었으며 무기수로 복역 중 1933년에 순국했다. 정읍시 영원면 은선리에 ‘백정기 의사 기념관’이 있다.

공원 내 백범기념관에 전시된 김구 선생의 인물화 Ⓒ소셜포커스
안중근의 의사의 사진과 유언이 수록된 자료 (서울시 자료)
공원 내 의열사에 모셔진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영정
공원 내 의열사에 모셔진 삼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영정

휠체어를 타고 둘러 본 공원은 일부를 제외하고는 이동약자 접근성이 대체로 양호한 편이었다. 지형의 고도차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탐방로는 경사로 형태를 갖추었으며, 가파른 곳이 몇 군데 있기는 하지만, 요철 구간도 거의 없다. 언덕에 있는 묘역들도 모두 별도의 장애인 접근로가 설치되어 있다. 그러나 개선이 필요한 사항들도 다수 발견되었다. 이는 다음 편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공원 내 광복70주년 기념 조형물 Ⓒ소셜포커스
공원 내 풍경 Ⓒ소셜포커스
공원 내 풍경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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