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투사들의 얼이 숨쉬는 효창공원 (하)
독립투사들의 얼이 숨쉬는 효창공원 (하)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1.03.22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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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 효창공원에 민족혼 불어넣고 독립투사들과 함께 잠들어
백범김구기념관, 김구 선생의 생애와 임시정부 독립운동사 고스란히 담아
네 자녀 요절하고 젊어서 부인까지 잃은 백범의 기구한 가족사에 가슴 저려
자주 눈에 띄는 공원 내 이동약자 불편시설, 공원정비 시 반드시 고려해야

서울 용산구 효창동에 있는 효창공원은 백범 김구 선생 등 독립투사들의 얼이 살아있는 곳이다. 공원 내에는 윤봉길, 이봉창 등 독립투사 여덟 분의 묘지가 있으며, 백범김구기념관이 있다. 효창공원에 독립투사들의 영혼을 모시게 된 것도 김구 선생에 의해서 시작되었고, 김구 선생이 마지막으로 그곳에 묻힘으로써 완성되었다.

백범김구기념관은 근현대사 역사박물관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민족의 완전 독립과 함께 아름답고 높은 문화를 가진 자주·민주·통일 조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겨레의 큰 스승이다. 이러한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알리고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2002년 10월 22일에 개관하였다.

지하1층 지상 2층으로 총면적은 9천750㎡이며, 외관상으로도 제법 웅장한 규모를 보이고 있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회가 관리·운영하고 있다. 기념관은 전시관 1층과 2층에 선생의 일대기와 한국 근현대사의 각종 기록과 자료를 전시하고 있다. 전시관 옆으로는 각종 교육프로그램 및 문화행사 등에 활용될 수 있는 교육장과 대회의실, 컨벤션홀 등 다양한 교육·문화공간을 갖추고 있다.

전시관으로 들어가면 중앙에는 2층 천장까지 뚫린 넓은 홀이 자리 잡고 있으며, 중앙 홀을 둘러싸고 다양한 전시공간이 꾸며져 있다. 2층에도 중앙 홀의 뚫린 공간을 감싸고 한 바퀴를 돌면서 김구 선생의 일대기와 임시정부에 관한 다양한 전시물을 관람할 수 있다.

중앙 홀은 태극기를 배경으로 한가운데에 순백색의 거대한 백범 좌상이 자리 잡고 있다. 한백옥 재질에 높이는 3m에 이른다. 좌상을 마주보는 순간, 숙연한 마음이 저절로 솟구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좌상을 제작한 조각가는 한국인이 아닌 중국인이고 한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백범기념관의 핵심 시설물 제작을 굳이 외국인에게 맡긴 이유가 궁금하다. 문화의 독립도 특별히 강조했던 김구 선생이 이 사실을 알면 무엇이라고 할까?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 입구 ⓒ소셜포커스
효창공원 내 백범김구기념관 입구 ⓒ소셜포커스
전시관 외벽 부조화(浮彫畵) 및 출입구 ⓒ소셜포커스
전시관 외벽 부조화(浮彫畵) 및 출입구 ⓒ소셜포커스
전시관 1층 중앙 홀의 백범좌상 ⓒ소셜포커스
전시관 1층 중앙 홀의 백범좌상 ⓒ소셜포커스
백범의 사상과 업적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상징 홀 ⓒ소셜포커스
백범의 사상과 업적을 한 눈에 알 수 있는 상징 홀 ⓒ소셜포커스
전시관 1층과 2층의 조감도(사진=백범김구기념관)

많은 사람들에게 김구 선생 하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주석으로만 알려져 있을 것이다.

전시실에 게시된 임시정부 초기(1919년) 조직 표에 의하면, 대통령(이승만) 아래에 국무총리(이동휘)가 있고, 그 아래에 내무총장, 외무총장, 재무총장 등 8명의 국무위원으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에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모습도 보인다. 총장은 현재의 장관이다. 그런데 김구 선생은 여기에 들어 있지 않다. 내무총장 아래 경무국장으로 되어 있다. 그 조직 표에 나타난 13명의 인물 중 가장 낮은 지위다.

김구 선생은 국내에 있을 때 못된 일본인을 처단한 일로 서대문감옥에 투옥되었다. 이때 ”독립정부를 건설하거든 청사의 뜰도 쓸고 창문 닦는 일도 해보고 죽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고 한다. 탈옥 후 전국을 잠행하다가 3·1운동 직후에는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문지기가 되기를 원했다. 김구는 임정요인 중 가장 낮은 지위에서 시작하였기 때문에, 실제로 문지기 역할을 담당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도 지위에 연연하지 않고 한없이 자기를 낮추었던 선생의 성품과 끝까지 임시정부를 지키고 주석에까지 오른 데 대한 위대함을 엿볼 수 있다.

임시정부가 1919년에 수립되고 1945년 광복을 찾을 때까지 26년이 넘도록 순탄하게만 운영되었던 것은 아니다. 수많은 위기도 있었고, 4,000Km를 떠돌아다니기도 했다. 계파 간 갈등도 적지 않았을 터이고, 거쳐 간 사람도 많았을 게다. 그러나 김구 선생은 한결같이 임시정부를 지켰고, 행정수반인 국무령과 주석이라는 최고 지위에까지 올라 끝까지 이끌었다.

1931년에 한인애국단을 조직하여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이끌어내 한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떨쳤다. 이로 인해 중국정부의 전폭적인 지원을 확보하는 등 독립운동의 아버지가 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된 가장 큰 계기는 1919년에 있었던 3·1독립선언이었다. 3·1운동 이후 국내외 각지에서 활동하던 인사들이 독립국을 세우려는 열망을 안고 상하이로 모여들었다. 이들은 먼저 국회와 같은 임시의정원을 조직하고,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다.

 ⓒ소셜포커스
호심인(好心人) 욕심을 버리고 그저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던 백범의 초심을 느낄 수 있는 공간 ⓒ소셜포커스
못된 일본인을 처단하고 백범이 처음으로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소셜포커스
못된 일본인을 처단하고 백범이 처음으로 투옥되었던 서대문형무소의 모습 ⓒ소셜포커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의 조직도, 백범은 가장 낮은 지위를 선택했다. ⓒ소셜포커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의 조직도, 백범은 가장 낮은 지위를 선택했다. ⓒ소셜포커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요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소셜포커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임시의정원 요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소셜포커스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사용되었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모습 ⓒ소셜포커스
임시정부 마지막 청사로 사용되었던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모습 ⓒ소셜포커스

1층 전시관은 주로 김구 선생이 전 국내에서 유년시절부터 상해로 망명하기 전까지의 행적을 소재로 하고 있다.

1층에는 김구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의 동상과 여사에 관한 기록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

곽낙원(郭樂園, 1859-1939) 여사는 김구에게 어머니이자 큰 스승이었다. 황해도 장연에서 출생한 곽낙원은 대범하고 강인했다. 감옥에 있는 아들을 찾아가 “나는 네가 경기감사를 한 것보다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1921년 중국 상하이로 망명하여 임정 식구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어른으로서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부인들이 생일을 준비하는 것을 알고 생일 차릴 돈을 달라고 하여, 그 돈으로 권총을 사 준 일도 있었다. 노구를 이끌고 4천Km의 임정로드를 따라다니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다가 1939년 머나먼 충칭에서 81세로 생을 마쳤다.

백범은 가정적으로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을 겪었다. 1924년, 임정 활동을 시작한 지 불과 5년 만에 부인 최준례 여사가 35세라는 한창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백범의 40대 나이에 일어난 일이다.

남겨진 자식들의 양육도 곽낙원 여사의 몫이 되었다. 그때 첫째 아들은 여섯 살이었고, 둘째 아들은 두 살이었다. 두 살 때 엄마를 잃고 할머니 곽낙원 여사의 손에서 길러진 아들은 광복 후 대한민국에서 공군참모총장에까지 올랐다. 김신 장군이다.

김구 선생에게는 두 아들 위로도 세 딸이 있었는데, 모두 어린 나이에 요절하였다. 큰아들마저 광복을 보지 못하고 선생보다 먼저 유명을 달리했으니, 네 자녀를 잃은 가정사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 선생이 서거할 때는 김신 장군만 유일한 혈육으로 남아 있었다.

2층의 특별전시실에는 김신 장군에 대한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김신 장군은 이곳 관장과 기념사업회 회장을 하다가 2016년도 세상을 떠났다. 세상을 떠나기 전 42억원의 재산을 미국의 하버드대 등 외국의 3개 대학에 기부했다. 대한민국 독립운동사 연구에 써달라는 목적이었다.

전시관 2층은 주로 임정에 참여한 시기부터 광복 후 서거할 때까지의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여기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역사를 자세히 조명해볼 수 있다. 윤봉길, 이봉창 등의 의열투쟁과 임정요인들의 행적, 한국광복군의 결성, 그리고 광복 후 서거할 때까지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보물 제1245호로 지정된 유물도 있다. 김구 선생의 자서전인 백범일지(白凡逸志)다. 백범일지는 자신의 일대기이기도 하지만, 임시정부완 관련한 기록은 임정실록이라고 봐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방대한 분량을 빽빽하게 써 내려간 육필 원고를 바라보니 선생의 위대함에 다시 한 번 숙연해졌다. ‘백범일지’는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고 있어 국민필독서라 할 만하다.

2층 전시관을 돌다 보면 추모공간이라는 작은 방이 나온다. 김구 선생이 독립과 통일을 염원하면서 쓴 휘호들이 걸려 있으며, 넓은 창문 너머로 선생의 묘역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다.

전시관에는 김구·장제스 회담의 기록화가 눈에 띈다. 장제스가 세계대전 후의 문제를 논의할 카이로 회담에 참석하기 전, 김구는 장제스를 만나 전쟁이 끝나면 한국이 독립을 보장받도록 요구하였다. 장제스는 영국 처칠 수상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을 설득하여 카이로 선언문에 한국의 독립 문제를 명시하였다. 이로 인해 한국은 2차 대전이 끝남과 동시에 광복을 맞이하게 된다.

민족의 큰 스승을 길러 낸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소셜포커스
민족의 큰 스승을 길러 낸 백범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소셜포커스
그 외 눈에 자주 띄는 이동약자 불편시설 ⓒ소셜포커스
백범 추모공간에 게시된 김구 선생의 휘호 ⓒ소셜포커스
백범 추모공간에 게시된 휘호와 추모공간에서 바라본 김구 선생의 묘소 ⓒ소셜포커스
백범 추모공간에서 바라본 김구 선생의 묘소 ⓒ소셜포커스
보물로 지정된 백범일지 ⓒ소셜포커스
보물로 지정된 백범일지 ⓒ소셜포커스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업적과 김구 선생과의 관계를 정리한 전시물 ⓒ소셜포커스
윤봉길·이봉창 의사의 업적과 김구 선생과의 관계를 정리한 전시물 ⓒ소셜포커스
김구 선생 및 장제스 회담의 기록화 ⓒ소셜포커스
김구 선생과 장제스 회담의 기록화 ⓒ소셜포커스
김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김신 장군 관련 전시물 ⓒ소셜포커스
김구 선생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김신 장군 관련 전시물 ⓒ소셜포커스

백범김구기념관을 나오면 김구 묘소를 지나 효창공원에 묻힌 독립운동가 8분의 영정과 위패를 봉안한 의열사(義烈祠)라는 사당이 있다. 공원 내에서는 가장 중심부에 해당하는 지점이다. 사당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의열문이라는 한옥 대문을 통해서 들어갈 수 있다. 의열문은 8개의 계단을 거쳐야 올라갈 수 있지만, 옆으로 이동약자를 위한 경사로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휠체어를 탄 필자는 그 경사로를 따라 대문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의열사 경내로 진입하려는 순간 건물의 기단과 마당 사이의 단차가 가로막았다. 한 뼘도 안 되는 턱이다. 저만치 의열사 건물이 보이고, 많은 사람들이 건물에 들어가 선열들의 흔적들을 둘러보면서 위패에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필자는 먼발치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야 했다. 8개 계단을 해소하기 위해 별도의 상당한 공간에 경사로를 설치해 두고서, 왜 한 뼘의 단차는 그대로 두었을까? 널빤지 하나만 걸쳐두었더라도 될 것을….

이는 분명한 이동약자 차별시설이다. 공공시설에서 장애인의 평등한 이용을 보장하지 않는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규정하는 장애인 차별행위에 속한다. 의도적인 것은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 그곳을 방문했던 얼마나 많은 이동약자들이 아픔을 안고 돌아서야 했을까? 필자는 즉시 관리사무소로 가서 시정을 건의했다.

백범기념관 입구의 길가에는 윤봉길 의사의 동상이 있다. 동상 주변으로 많은 기록들이 돌판에 새겨져 있지만, 계단을 오를 수 없는 장애인들은 그 기록들을 볼 수 없다. 계단 위는 도로와 수평을 이루고 있어 측면으로 통로를 내주면 휠체어도 충분히 접근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공원 내의 주 탐방로는 널찍하고 휠체어가 다니기에도 편리하다. 선열들의 묘지는 모두 둔덕에 자리 잡고 있어 많은 계단을 거쳐서 올라가야 하지만, 측면으로 우회하여 상당한 공간에 휠체어 접근로가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이동약자 접근성 개선에 노력한 흔적이 엿보이는 반면, 조금만 신경 쓰면 개선될 수 있는 부분은 의외로 방치된 곳이 많다.

일부의 산책로나 휴게 공간 진입로 등에 요철이 심한 자연석을 깔아 휠체어 통행을 어렵게 하고 있다. 공원 내에는 음료수나 기념품을 살 수 있는 매점이 하나 있지만, 진입로의 문턱으로 인해 휠체어는 들어갈 수 없다. 이 또한 장애인 차별행위이다.

서울시는 효창공원을 독립운동 기념공원으로 재단장을 실시할 예정이라 한다. 재단장을 할 때는 공원 이용자는 모든 시설에 대하여 누구나 아무런 불편이 없이 동등하게 이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었으면 좋겠다. 이 또한 이곳에 잠든 순국선열들의 뜻이 아닐까?

의열사와 의열사 정문, 그리고 한뼘도 안 되는 정문의 단차 ⓒ소셜포커스
의열사와 의열사 정문, 그리고 한뼘도 안 되는 정문의 단차 ⓒ소셜포커스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한 윤봉길 의사의 동상, 이동약자를 위한 배려가 아쉽다. ⓒ소셜포커스
휠체어 접근이 불가능한 윤봉길 의사의 동상, 이동약자를 위한 배려가 아쉽다. ⓒ소셜포커스
이동약자의 통행이 곤란한 요철구조의 노면과 단차 ⓒ소셜포커스
이동약자의 통행이 곤란한 요철구조의 노면과 단차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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