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잠든 도산공원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이 잠든 도산공원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1.04.06 09:5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산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이며 사상가인 민족의 스승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세계 곳곳 누비며 민족교육에 힘써
공원 내 핵심시설인 도산 묘소, 이동약자는 접근 곤란

 

[소셜포커스 조봉현 논설위원] = 도산공원은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있다. 약 3만㎡ 정도의 아담한 소공원이다. 도심의 평지에 있어 장애인 등 이동약자도 방문하기 좋다. 이 공원은 도산 안창호의 애국정신과 교육정신을 기리고자 조성되었다. 공원에는 도산의 묘소와 함께 기념관도 있다.

우리 민족의 근대사에서 도산 안창호 선생만큼 뛰어난 선각자가 얼마나 될까? 도산은 계몽사상가이자 교육자이며, 독립운동가이자 명연설가로도 유명하다.

도산은 1878년에 평안남도 강서군에 있는 대동강 하류의 도룡섬에서 태어났다. 강서군은 평양에서 서남쪽으로 약 20km의 거리다. 지금의 지도에는 그 섬이 나타나지 않은 것을 보면, 육지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한강의 뚝섬처럼 아주 작은 섬이 아니었나 싶다.

1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평양으로 이사를 했다. 5살 때도 이사를 한 적이 있다. 출생지와 어린 시절을 보면 역경이 참 많았을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똑똑하기로 이름이 났다고 한다.

1894년에 청일전쟁이 일어났다. 우리 땅에서 일어난 청나라와 일본의 전쟁이었다. 평양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그때 도산은 17세였다. 다른 민족끼리 일으킨 전쟁의 피해를 힘없는 우리가 떠안아야 하는 참혹한 현실이었다. 이를 목격한 도산은 힘없는 민족의 불행을 통감했다. 그리고 조국의 힘을 키우는데 일생을 바칠 것을 다짐한다.

서당에서 배운 한학이 학업의 전부였던 선생은 18세에 큰 뜻을 품고 서울로 갔다. 무일푼으로 거리를 떠돌던 선생은 무료로 숙식 해결과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선교사들의 말을 듣고 밀러학당에 입학했다. 거기에서 신학문을 배우고 기독교에 입교한다. 워낙 총명했던 선생은 3년간의 교육과정을 마치고 이곳의 조교로도 일했다.

고향에서는 집안 어른들이 결혼을 서두르고, 약혼까지 했다. 당시의 풍습으로는 본인들은 얼굴도 보지 못하고, 부모들이 정해준 대로 결혼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큰 뜻을 품은 도산은 아무렇게나 결혼을 할 수는 없었다. 도산은 규수의 부모를 찾아가 거절했다.

“저는 큰 일을 해야 하니 배운 사람과 결혼하고 싶습니다. 이 결혼은 불가합니다.”

도산의 인물됨을 잘 아는 규수 쪽에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럼 우리 딸도 배우면 되지 않는가? 자네가 맡아서 가르치게나”

도산은 하는 수 없이 그 여인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여학교에 입학을 시켰다. 여동생도 함께 데려와서 입학시켰으며, 결혼은 일단 미루었다.

남녀 평등의식이 희박했고, 특히 교육에 있어서 성차별이 심했던 시절, 교육에서 양성평등을 실천했던 선생의 선각자적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후 독립협회 활동으로 각지를 돌며, 만민공동회 연설을 통해 민족의 계몽과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뛰어난 말솜씨로 대중들을 사로잡았다. 도산의 연설에 감동한 이승훈이 오산학교를 세웠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독립협회가 강제로 해산되자, 고향으로 가서 점진학교를 세우고, 직접 교육사업을 시작하였다. 황무지 개간사업도 추진하였다. 불과 22세의 나이였다.

물론 도산이 혼자서 학교를 세울 재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도산의 연설을 듣고 많은 유지들이 기금을 내 놓는 등 학교설립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교육사업을 하던 도산은 보다 나은 교육을 위해서 더 큰 공부를 해야겠다며, 미국 유학을 결심했다. 약혼녀에겐 “결혼은 유학을 다녀온 후로 더 미루자”고 했다. 그러나 여자 쪽에서도 이에 지지 않았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날 인천항까지 쫓아가서 “죽을 데를 가더라도 같이 가고 싶다.” 고 간청하였다. 그날 급히 결혼식을 올리고, 다음 날 부부는 함께 머나먼 뱃길을 떠났다.

도산공원 입구와 공원 안내도 ⓒ소셜포커스
도산안창호기념관 ⓒ소셜포커스
도산안창호기념관 입구에 있는 안창호 사진과 좌상
도산안창호기념관 입구에 있는 안창호 사진과 좌상 ⓒ소셜포커스
도산의 출생과 성장기의 과정을 소개하는 기념관 전시물 ⓒ소셜포커스
도산의 출생과 성장기의 과정을 소개하는 기념관 전시물 ⓒ소셜포커스

아르바이트와 공부를 위해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선생 부부는 노동자 등으로 먼저 건너온 한인들의 생활상을 목격하고 공부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동포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위생관념이 없었으며, 생활이 엉망이었다. 특히 한인 인삼장수끼리 영업구역을 놓고 거리에서 싸우면서 구경거리가 되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당연히 한인들은 열등한 민족으로 인식되었다. 얼마 안 되어 외교권을 빼앗기고 이어서 나라까지 잃었으니 동포들에 대한 미국인들의 시선은 오죽했을까?

동포들을 찾아다니며 계몽운동을 했다. 당시의 이민자들은 농장 근로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들에게 과일 하나를 따더라도 정성을 다하라고 가르쳤다. 그때 한국인삼이 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는데, 인삼 장수들에겐 상도의를 지키면서 합리적인 가격 협정으로 서로의 이익 보장과 협동 체제를 갖추도록 했다.

동포들도 처음에는 자기보다 어린 도산의 행동을 냉소적으로 봤을 것이다. 그러나 찾아다니며 청소까지 해주는 등의 언행일치에 신뢰와 존경으로 따르게 되었다.

예의와 책임감에다 성실성을 갖춘 새로운 사람으로 바뀐 동포들은 현지에 받는 대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자연히 수입도 늘어났다. 도산은 한인친목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한인들의 결집을 통해 독립의식 고취와 교육에 더욱 힘썼다.

선생은 1905년 을사늑약으로 외교권을 빼앗겼다는 소식을 듣고, 울분을 참지 못했다. 조국으로 돌아가서 직접 항일 운동에 나서기로 결심한다.

국내로 돌아온 안창호는 신민회 등 독립운동 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대성학교를 세워 교육사업을 펴고, 민족 지도자들을 길러 내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일제의 핍박이 더욱 강해지자 망명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중국과 러시아를 순회하고, 유럽을 거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미국에서 민족운동 단체인 흥사단을 만들었다. 멕시코 한인들의 요청으로 멕시코 전역을 순회하면서, 그곳 한인들에게도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미국에서 3·1 운동 소식을 듣고 자금을 모아 상해로 가서, 임시정부 설립에 참여했다. 임정에서 중책을 두루 맡아 국내외 연락망을 조직하고, 흩어져 있던 독립운동 세력들을 하나로 모으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민족계몽과 독립운동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다녔다. 교통과 통신수단이 지금과 비교 자체가 안 될 만큼 형편없던 시절, 러시아와 유럽 등 지구를 돌면서 민족을 연결했던 도산의 역량은 초인적이었다.

한국과 미국, 중국 등을 오가며 활동하던 선생은, 1932년 윤봉길 의거가 일어나자,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감옥생활을 하다가 출옥했으나, 1937년 수양동우회(흥사단 계열의 국내 민족운동 단체) 사건으로 투옥되었다가 건강악화로 다시 출감했다. 그리고 1938년 3월 10일 경성대학 부속병원에서 60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한국 근대사의 위대한 선각자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도산이 미국에서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하는 모습을 담은 전시물 ⓒ소셜포커스
도산이 미국에서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하는 모습을 담은 전시물 ⓒ소셜포커스
도산이 미국에서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하는 모습을 담은 전시물 ⓒ소셜포커스
도산이 미국에서 민족계몽 및 독립운동을 하는 모습을 담은 전시물 ⓒ소셜포커스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모습 ⓒ소셜포커스
상해 임시정부에서의 활동 모습 ⓒ소셜포커스
세계를 누비는 도산의 발자취를 담은 전시물 ⓒ소셜포커스
세계를 누비는 도산의 발자취를 담은 전시물 ⓒ소셜포커스
순국하기 전 국내 활동의 모습 ⓒ소셜포커스
순국하기 전 국내 활동의 모습 ⓒ소셜포커스

서울시는 1973년 11월,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던 선생의 유해를 강남구 신사동으로 옮기고 공원을 조성했다. 그리고 미국 LA에서 이혜련 여사의 유해도 모셔왔다.

공원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도산기념관이 있다. 기념관에는 도산의 활동에 관한 각종 사진과 서한문, 흥사단 활동 시의 문서, 임시정부 사료, 도산일기 등이 전시되어 있다.

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곳곳에 선생의 어록을 새긴 말씀비를 발견할 수 있다. 명연설가로도 유명한 선생이 동포들에게 남겼던 교훈들을 되새겨볼 수 있다.

공원 내 각종 산책로 및 기관념관 등은 이동약자 접근성이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그러나 공원을 탐방하던 필자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발견하였다. 도산의 묘소 앞에 이르렀는데 5개의 계단이 가로막았다. 도산의 묘소는 바로 이 공원의 핵심일진대, 장애인은 위인들을 추모하고 참배하는데도 차별받아야 하나?

계단의 측면은 지형이 완만하게 묘소 앞까지 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그곳으로 통로를 내 주면 충분히 접근 가능한 지형이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무장애 시설이 될 수 있음에도 이를 방치하는 것은 장애인차별금지법에서 규정하는 차별행위에 속한다.

그 외에도 배수로 건널목 등 조금만 신경쓰면 해결될 불편시설이 가끔 눈에 띄었다. 조속히 시정되어야 할 사항들이다.

공원 내 널찍하고 평평한 탐방로와 이동약자 접근성이 쉬운 휴게시설 ⓒ소셜포커스
공원 내 널찍하고 평평한 탐방로와 이동약자 접근성이 쉬운 휴게시설 ⓒ소셜포커스
공원 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안창호 선생의 말씀비 ⓒ소셜포커스
공원 내 곳곳에서 만날 수 있는 안창호 선생의 말씀비 ⓒ소셜포커스
공원의 핵심시설인 도산 묘소, 이동약자는 접근하기 어려운 차별시설이다. ⓒ소셜포커스
공원의 핵심시설인 도산 묘소, 이동약자는 접근하기 어려운 차별시설이다. ⓒ소셜포커스
묘소에 접근하는 계단 옆으로 완만한 경사구조의 공간이 있다. 이곳에 장애인 접근로를 설치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소셜포커스
묘소에 접근하는 계단 옆으로 완만한 경사구조의 공간이 있다. 이곳에 장애인 접근로를 설치 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소셜포커스
공원 내 급수시설,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시설과 그렇지 않은 시설 ⓒ소셜포커스
휠체어 통행을 어렵게 하는 공원 곳곳의 단차 ⓒ소셜포커스
휠체어 통행을 어렵게 하는 공원 곳곳의 단차 ⓒ소셜포커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