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한 판사의 고백록
인간다움을 지키고자 한 판사의 고백록
  • 김희정 기자
  • 승인 2021.04.12 08: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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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FOCUS - 어떤 양형 이유]
법정 평가 뒤 소실된 구체적 인간과 고통의 기록

『어떤 양형 이유』 │박주영 저│ 김영사 │ 14,000원

“가정폭력의 피해자들이 장구한 세월 겪어왔을 고통의 무게를 전부 공감했노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기록에 비치는 고통의 한 자락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웠다.”

“’저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이 시대 대한민국에서, ‘삶이 있는 저녁’을 걱정하는 노동자와 그 가족이 다수 존재한다는 현실은 서글프기 그지 없다.”

놀랍게도 위 글은 판사가 작성한 법정 판결문의 일부다. 법적으로 필요한 사실만을 건조하게 나열한 것이 판결문이지만, 메마른 판결문 속 이런 형을 정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히는 ‘양형 이유’에 박주영 울산지법 판사가 남긴 기록이다.

박주영 판사는 피고인에게 특별히 전할 말이 있거나, 사회에 메시지를 던지고 싶을 때 ‘양형 이유’를 공들여 쓴다고 밝혔다. 지난해 ‘가출 청소년 성매매 강요 사건’을 판결하면서는 “순수한 자발적 성매매는 없다”며 다수의 논문과 서적을 인용해 주목을 받았고, 2019년 7월 징역 7년을 선고하던 ‘아동학대치사’ 사건 판결문 말미에는 “아동학대 사망자의 마지막 이름이 부디 ‘ㅇㅇ이’ 이기를 간절히 소망한다”고 적었다.

생의 극단이 모이는 곳, 인간의 바닥을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법정에서도 ‘인간성’을 복원하고자 했던 박주영 판사의 ‘양형 이유’ 일부와 그의 법정 안팎의 기록이 모인 책이 김영사에서 발간된 『어떤 양형 이유』다.

저자는 이 책이 기록 뒷면의 눈물을 모두 담을 수는 없었지만 “법정 평가로 소실돼버린 구체적 인간과 그들의 고통 일부를 복원해낼 수 있었다”고 했다. 유죄와 무죄만으로 단순히 결론지어지는 법정 이야기는 박주영 저자의 손으로 어느 소설이나 영화보다 치열하고 생생한 삶에 대한 이야기로 바뀌었다.

스스로를 승진을 포기한 판사 ‘승포판’, 출세를 포기한 판사 ‘출포판’이라 칭하는 박주영 판사는 잔 펀치에 나가떨어지듯 재판에서 마주친 각종 눈빛들에 환영처럼 시달리며 피폐해졌다 고백한다. “소년원으로 가며 울부짖던 눈빛, 집으로 가라고 했는데 더 당황하던 눈빛, … 꽃 같은 딸이 살해된 부모의 눈빛” 그 눈빛들에 목덜미를 붙잡힌 저자는 그를 스쳐갔던 각종 삶의 파편들과 이를 바라보는 자신의 눈물을 책을 통해 고백한다.

하지만 저자는 법정에서 마주한 극단의 상황에서도 끝내 인간성을 잃지 않고 “다정다감한 주체”이자, “다른 인간에 대한 일말의 애정과 연민”을 품기 위해 애쓴다. 그런 저자의 삶에서 준엄한 법정 속 흩어진 ‘인간’의 존재를 다시금 들여다본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책은 스스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내가 감응하는 책을 통해 나의 삶의 가치를 쌓아간다. 『어떤 양형 이유』를 통해 법정이라는 도마 위에 올려진 평범할 수도 있었을 각종 삶을 읽고, 타인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위치에 선 자의 고뇌를 읽는다. 그리고 그를 통해 내가 사는 삶이 부끄럽지 않도록 내 가치의 나침반을 조정해본다.

[소셜포커스 김희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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