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고등학교 국어(현대문) 교과서에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일본 고등학교 국어(현대문) 교과서에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 조봉현 객원논설위원
  • 승인 2018.12.03 19: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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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본의 치쿠마쇼보(筑摩書房)에서 발행한 고등학교 국어(현대문) 교과서에 실린 내용을 필자가 번역한 글이다. 번역한 내용 중에는 우리의 언어관습으로 보아 좀 어색한 부분도 있을 것이나, 이는 일본의 언어관습을 가급적 그대로 보여주고자 의역을 지양했기 때문이다. [옮긴이의 말]

[일본 고등학교 국어(현대문) 교과서에 실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지은이 이바라끼 노리코
옮긴이 조봉현

한국에서 좋아하는 시인을 물으면, 『윤동주』2)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경우가 많다.

2)윤동주 1917-45년. 한국의 시인 (일본 교과서 원문에 실린 주석을 번역, 이하 ‘원문 주’로 표기)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살아있는 모든 것을 사랑하지 않으면3)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이부키 고- 역)4)

3) 원시에서는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되어 있으나, 일본 번역자(이부키 고-, 伊吹 鄕)가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변형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 학생들을 위한 일본 학습서(참고서)에서는 “살아있는 모든 것을 소중한 것으로서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된다.(生あるすべてものを大切なものとして愛さねばならない)”라고 설명하고 있다.(번역자 조봉현의 주석, 이하 ‘역자 주’로 표기)
4)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어로 번역한 사람은 일본인 한국문학연구가인 ‘이부키 고-’이며, 이 글을 쓴 ‘이바라키 노리코’는 이부키가 번역한 것을 인용하였다. 이 글에서 소개하는 다른 시도 마찬가지다. 여기서는 일본 학생들이 배우는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기 위하여 원시를 인용하지 않고, 일본어 번역시를 한글로 재번역을 하였다.(역자 주)

20대 아니면 절대 쓰지 못하는 그 청렬한 시풍은 젊은이를 사로잡기 충분한 내용을 지니고 있다. 오래 살아온 만큼 부끄러움 많은 인생이니 이렇게는 도저히 쓸 수 없다.

시인에게는 요절의 특권이라는 것이 있어, 젊음과 순결을 그대로 동결시켜버린 듯한 청아함은 후세의 독자를 사로잡지 않을 수 없고, 열면 항상 수선화 같은 좋은 향기가 진동한다.

요절이라고 썼지만, 윤동주는 사고나 병으로 죽은 것은 아니다.

1945년 패전일을 불과 반년 앞두고 만 27세의 나이로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옥사한 사람이다.

처음에는 릿쿄(立敎)대학 영문과에 유학, 이후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로 옮기면서 독립운동5) 혐의로 시모가모6) 경찰에 붙잡히면서 후쿠오카로 보내진다.

5) 일본 교과서에는 이 독립운동에 대하여 “조선의 독립을 구하는 운동. 1910년부터 1945년까지 조선은 일본에 합병당해 있있다.” 라는 주석이 달려 있다.(역자 주)
6) 교토시에 있는 지명(원문 주)

거기에서 내용물을 알 수없는 주사를 계속해서 맞았다고 한다. 사망 직전에는 모국어로 뭔가를 크게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하나, 그 말이 무엇이었는지 일본인 간수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동주씨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큰소리로 외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라는 증언이 남아있다.

통한의 생각없이 이 시인을 느낄 수는 없다.

언젠가는 일본인들에 의해서 그 전모가 밝혀져야 하는 사람이었고, 그 존재를 알고 나서부터 나도 조금씩 윤동주의 시를 번역하기 시작하고 있었는데, 그가 가고난 후 30년째가 되던 1984년 이부키 고-씨에 의해서 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완역이 이루어졌다..

나의 기세는 꺾였지만 이부끼 고-씨의 훌륭한 번역과 연구에는 완전히 모자를 벗었으며(경의를 표했으며), 가련한 동요에 이르기까지 일본에서 읽을 수 있게 된 것은 무엇보다 기쁜 일이었다.

원작을 아는 나로서 고생을 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그뿐만이 아니라, 윤동주의 배경을 알기 위해 철저하게 발품을 팔아서 조사한 열정에도 감복했다

유학처인 도쿄, 교토, 후쿠오카형무소와 그 발자취를 따라 80대의 예전 특별고등경찰형사와도 만나는 등 최대한 노력을 하였으나 결국 옥사의 진상을 밝혀낼 수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유감이지만, 그 실증정신에는 오히려 신뢰가 간다.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언젠가는 밝혀지게 되었으면 하는 맘이다.

이부키 고-씨를 만났을 때, 조사의 과정에서의 일본검찰의 벽이 얼마나 두꺼운지를 자세히 들을 수 있었다.

40년 전의 일이다. 왜 그렇게 비밀주의, 은폐주의인 것일까?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진지한 연구자에 대해서는 좀 더 자료를 공개해야만 하지 않을까.

그리고 또 윤동주의 과거의 하숙집이나 연고지 등 방문하고 증언을 구하려고 해도 누구 하나 그를 기억하고 있는 일본인도 없었다고 한다.

사진을 보면 실로 청결하고 아름다운 청년이며 결코 희미한 인상은 아니다. 흔하지도 않다.

사실은 내가 윤동주의 시를 읽기 시작한 계기는 그의 사진이었다. 이런 늠름한 청년이 어떤 시를 쓴 것일까라는 호기심, 말하자면 좀 순수하지 못한 동기였다.

대학생다운 지적인 분위기, 그야말로 오점하나 없는 젊은 얼굴, 내가 어린 시절 우러러 본 대학생이란 이런 사람들이 많았겠구나 하는 그리운 감정. 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그런데도 일본인 어느 누구의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았다.7)

7)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처음에는 일본에서 윤동주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으나, 현재에 수많은 일본인들이 윤동주에 열광하는 것은 20년 전부터 고등학교 교과서에 소개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인 것으로 생각된다.(역자 주)

영문학 연습 85점, 동양 철학사 80점으로 그 성적도 우수한데도 교수에게도 인상이 남아있지 않았던 것일까.

루쉰8)에게 있어서 후지노 선생9) 같은 존재10)조차 하나 없었던 것이다.

8) 루쉰; 1881-1936, 중국의 소설가·평론가. 광인일기, 아Q정전등의 작품이 있다.(교과서 주)
9) 후지노 선생; 후지노 켄구로-(藤野嚴九郞). 1874-1945년. 의학자. 센다이의학전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학생으로서 접했던 루쉰은 그 인품을「후지노 선생」(朝花夕捨에 수록)에 그렸다.(원문 주)
10) 루쉰에게 있어서 후지노 선생; 중국 현대문학의 대부로 불리는 루쉰은 청년 시절에 의사가 되고자 일본 센다이 의학전문학교에 유학한 적이 있다. 여기서 후지노 교수를 만나게 되었는데, 일본 학생들의 멸시 속에서도 후지노 교수의 각별한 지도를 받았다. 그러나 루쉰은 어떤 사건을 계기로 중국인들의 의식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뜻한 바가 있어 학교를 중퇴하고 문학의 길로 들어섰으며, 중국의 대문호이자 혁명가이며 사상가 되었다. 루쉰은 나중에 자신의 산문집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에서 「후지노 선생」이라는 글을 통해 후지노 교수의 인품을 소개하였다.(역자 주)

윤동주의 깊은 고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쉽게 씌여진 시

창밖에는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을 알면서도
한 줄의 시를 써 볼까?

땀냄새와 사랑의 향기로 포근히 감도는
보내주신 학비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노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돌이켜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엇을 바라
다만 홀로 생각에 잠기는가?

인생은 살기 어렵다고 하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가 저항 시인인지 아닌지, 한국에서도 여러 가지 논란이 있으나 조선어를 탄압하던 당시 단호하게 한글11)로 쓴 이 시들은 편지와 함께 받았던 친구가 항아리에 넣고 지하 깊숙히 숨겨 보관했기 때문에 남아있다고 한다.

11) 한글; 한국고유의 문자, 모음자와 자음자를 조합하여 음절을 이루고 있다.(원문 주)

그것을 전부 모아도 백 여 편, 일본 관헌에 압수된 시는 행방을 알 수 없다.

그 당시, 한글로 시를 쓰는 것 자체가 엄청난 저항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반년만 더 살았다면 전후의 고국에서 제일선의 활동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생전에는 한권의 시집도 없이 무명의 청년이었지만...

1984년 가을, 일본에서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씨를 만날 수 있었다.

일주씨는 건축학자로 성균관대학교 교수이기도 하지만, 우연히 도쿄대학교 생산기술연구소 객원교수로 일본에 와 있었다.

윤동주의 시 ‘아우의 인상화’라는 것이 있어, 그의 시 중에 가장 좋아하는 한편이었으므로, 그 동생을 실제로 만났다는 사실이 감개무량하였다.

아우의 인상화

빨간 이마에 차가운 달빛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걸음을 멈추고
살며시 작은 손을 잡으며
자라서 뭣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말은, 확실히 서투른 대답이다. 12)

잡았던 손을 슬며시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본다

차가운 달빛이 빨간 이마에 드리우고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12) 윤동주의 원시에서는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라고 함(역자 주)

열살 차이의 어린 동생의 손의 감촉까지 전해져 오는 듯하다. ‘사람이 된다’는 ‘인간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되겠지만, 어쨌든 형의 허를 찌르는 대답으로 그것이 한편의 시를 탄생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개도 개가 되고자하고 고양이도 고양이가 되고자 하는 것일까? 인간은 태어날 때는 동물에 지나지 않지만, 오랜 시간 걸려서 아마도 죽기 직전까지 인간이 되고자 지향하는 불가사의한 생물이다.

윤동주도 그런 지향이 강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린 동생의 “사람이 되는 거”라는 대답에 충격을 받고 반응한 것일 터이다.

게다가 이 동생이 성장할 무렵 지금의 모국에서는 정당한 인간도 될 수 없는 건 아닐까라는 암담한 생각이 ‘동생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라는 시구로 뿜어나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어린 시절의 앳된 예언처럼 동생 일주씨는 지금, 58세 정도의, 아주 훌륭한 ‘사람이 되어’ 그 당시 형과의 문답은 희미하게나마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독실하고 생각이 깊은 인품, 어딘지 모르게 장난기도 있고 "전 왠지 형의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것 같다는……."

웃음지으며 말했지만 분명 여러 곳에 산발적으로 남겨진 시의 원고를 오늘날 모두가 읽을 수 있게 정연하게 자취를 더듬어 시집으로 정리한 것도 아우이고, 연세대학교에 있는 윤동주 시비의 설계를 한 것도 일주씨이다.

전공의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형님을 위해서 쓴 걸까.

그때 부인과 따님도 함께였는데 “이 아이는 백부(윤동주)를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라고 부인은 말했고, 그 대학생 따님은 수줍고 맑은 목소리로 “별 헤는 밤” 한편을 낭독하였다.

일주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요즘 아버지를 자주 생각해요. 어떤 심정으로 형의 뼈를 안고 후쿠오카에서 부산 그리고 흔들리는 기차로 북간도13)(구 만주14))의 집까지 돌아갔을까 하고….”

13) 북간도 현재 중국 길림성에 있는 조선족자치주(원문 주)
14) 만주 현재의 중국 동북지역(원문 주)

한반도의 끝에서 끝까지 오랜 여정, 당시엔 도대체 얼마나 시간이 걸렸던 것일까? 유골을 안고 분만을 풀 길이 없는 부군(사망), 당시의 심정을 생각했던 아들 말은 어떤 심한 탄핵보다 푹 이쪽의 세포를 찌르는 듯했다. 심상치 않은 아들의 죽음은 부모에게는 확실하게 학살로 받아들여지고 있었을 것이다.

아무렇지도 않게 세상 이야기처럼 말한 일주씨의 말이 이렇게나 강하게 바로 우리의 마음에 와 닿다니... 전달의 메카니즘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년 전 나는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에서 부산까지 현해탄15)을 건넌 적이 있다. 저녁 출항하고 차츰 큐슈도 멀어지고 바다의 색깔도 쪽단지16)처럼 짙어지고, 6천톤 배도 한 장의 나뭇잎처럼 미덥지 못한, 의지할 곳 없이 큰 파도에 몸을 맡겼다.

15) 현해탄 큐슈의 북서부에 있는 넓은 해역, 현계탄 (원문 주)
16) 쪽단지 교과서 원문에서는 남호(藍壺)라고 표기되어 있고, “남즙을 저장해두는 단지. 남염색 등에 쓰인다. 아이가매”(藍甁;쪽병)이라는 주석이 달려있으며, 일본의 학습서에서 쪽빛 염색을 하는 염즙처럼 파랗게 짙어지는 바다의 색깔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거칠다고 들었던 현해탄도 그날은 온화하고, 시시각각 바뀌는 바다색, 석양, 옻칠 한 검정의 암흑, 반짝이 시작하기 무섭게 하늘가득이 번쩍거리는 초가을의 별자리, 섬의 등불인가 하고 잘못 볼 오징어 낚시배, 그것들에 눈길을 준 채 나는 늦은 밤까지 갑판을 떠날 수가 없었다.

맑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내 주위를 짙은 안개 같은 것이 에워싸고 있었다.

공기가 진하다고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슬픔 마음. 오싹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상쾌한 것도 아닌 영기17). 굳이 말하자면 역사의 비수라고 명명하고픈 무엇인가...

17) 영기(靈氣) 일본의 학습서에서는 “神祕的な氣配”(신비적인 기분)라고 설명

고대부터 가장 빨리 열린 바닷길, 수많은 사람들의 왕래, 무수한 생각, 파도 위에도 파도 아래에도 떠도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엇인가.

평소 결코 영감이 강한 것이 아니어서 이때의 이상한 감각은 나중까지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윤동주의 마음도, 유해를 안고 돌아간 부친의 마음도 그 안에 섞였던 것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유골함에 들어가지 못한 윤동주의 뼈가루를 부친은 현해탄에 뿌렸다고 한다.

동생 일주씨와 얘기하면 할수록 그 인품에 점점 마음이 끌려갔다. 나의 뇌리에 “인간의 질”이라는 말이 아른거리더니 딱 멈추었다. 그다지 의식하지 않았지만, 생각하면 젊었을 때부터 줄곧 ‘인간의 질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결정되는 건가?”라는 것을 종종 꽤 오랫동안 생각하고 계속 지켜보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상한 체험이었다.

그것도 윤일주라는 훌륭한 ‘인간의 질’을 접하고, 그것이 확실히 드러남으로써 당연한 결과로 형인 윤동주도 또 그런 사람이지 않을까라는 상상을 했다.

아주 조용하고 따뜻한, 바닥을 모른 깊이를 느끼게 하는 인격.

하지만 삼년간은 일본 유학생 시절 이부끼 고-씨의 세밀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뭐라고 말할 수 없이 아쉬운 일이다.

어쨌든 윤동주·일주 형제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최근 나의 큰 기쁨이다.

<저자소개> 
이바라키 노리코 : 1929(타이쇼 15) - 2006(헤세이 18), 시인, 오사카부에서 태어났다. 1953년 카와사키 히로시와 함께 시지 『노』를 창간, 전쟁 후 시에 신풍을 불어 넣었다. 시집에 『보이지 않는 배달부』, 『진혼 노래』, 『의지하지 않은 채』, 평론에 『시의 마음을 읽는다』등이 있다. 이 문장은 1986년 간행 『한글로의 여행』에 실려 있으며, 본문은 그 문고판에 따랐다.

윤동주 시비
윤동주 시비
조봉현
조봉현

※ 이 글을 옮긴 조봉현은 지체장애인이며, 동수원세무서에 운영지원과장으로 재직중이다. 수십년간 장애인 인권운동에도 앞장서 오면서 정부와 언론사로부터 대통령 표창, 민원봉사대상, 사회공헌대상 등 각종 표창을 수상하였고, 장애인 권리를 위한 각종 입법운동에도 노력하여 법제처로부터 최우수국민법제관으로 뽑히기도 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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