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토] 정조의 숨결을 거닐다 '수원화성'
[포토] 정조의 숨결을 거닐다 '수원화성'
  • 김태일 기자
  • 승인 2019.06.09 14: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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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포커스 김태일 기자] = 조선시대까지 주요 도시를 구분짓고 전시에 최후 방어선이 되었을 '성벽'이 우리나라에 실존했다는 증거를 내눈으로 찾기가 서울에서는 사실 쉽지 않다. 군데군데 흔적만 남아있는 벽의 일부와 부분적으로 성문 정도만 남아있어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성이었다는 거지?' 싶은 거다. 

그런데 눈을 돌려 경기도 수원을 바라보면, 작지만 짜임새있고 화려하지 않지만 실용적인 '성'이 잘 복원되어 있으니 바로 '수원화성'이다. 뒤주에 갖혀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를 수원으로 옮기며 도성을 조성했다는 정조의 효심은 잘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실학과 과학기술을 총동원하여 이를 바탕으로 노론세력을 극복하고 백성을 위한 개혁정치의 새로운 토대로 삼으려했던 시도는 축성 다음해 49세의 나이로 정조가 세상을 떠나면서 미완의 과제로 남았다.

징검다리 휴일의 '마지막 돌' 쯤 되는 날, 아이들과 수원화성을 찾아 낮은 언덕들을 거닐었다.

화성의 북쪽출입구에 해당하는 장안문의 과거와 현재 복원 모습
장안문을 찾은 외국인 단체관광객. 유료라고 매표소는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자유관람에 가깝다.
성벽 곳곳에 경사로가 있어 장애인 접근이 수월했지만, 주요 성문 내부를 관람하기 위해서는 가파른 계단을 올라야만 한다.
성벽 위 '타구'를 통해 내려다본 길거리 풍경. 전쟁시 적을 공격하거나 망을 보는 공간이었다.
'북서적대'에 놓인 화포 모형
멀리서 접근하는 적을 관찰하고 타격하기 위해 세워진 '서북공심돈'
정조가 행차시에 머물던 '화성행궁'에는 사도세자가 갖혀 죽은 뒤주 체험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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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궁 내 정조가 활쏘기 시범을 보이던 '득중정' 앞뜰. 문화해설사님이 '정조는 군사들이 자신감을 가질 수 있도록 일부러 활 1~2발은 명중시키지 않았다'고 설명했는데... 글쎄~
행궁을 지키는 군사들의 공간 '북군영' 앞에는 관람객들의 소원지가 빼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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