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스케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현장스케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해 모인 사람들
  • 박예지 기자
  • 승인 2020.06.01 09:0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를 보라!'...제18회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 마로니에 공원에서 28일 개막
'친구야, 보고싶다!'...근육병 앓다 세상 떠난 친구를 기리는 자원봉사자
기자회견장에서 영화제로 '동에번쩍, 서에번쩍' 중증장애인
'동등한 사람'임을 깨닫기를...사회복지학과 학생
"모두 찾아올 수 있는 차별 없는 가게 만듭니다"...카페 '트랜스' 사장님

[소셜포커스 박예지 기자] = 유난히 화창했던 지난 28일, 올해로 18회째를 맞은 서울장애인인권영화제가 막을 올렸다. 감염병 사태가 끈질기게 명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지금 당장 해야할 이야기를 각자 묻은 채 흘려보낼 수는 없기에, 수많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마스크로 중무장한 채 마로니에 공원에 모였다.

12시부터 영화가 상영되고 있던 공원에 도착한 것은 오후 4시쯤이다. 소소하게 복작거리는 광장을 지나 무대를 향해 걷는다. 부대행사 '전염병으로 드러난 사람들'이 시작되기 앞서 천막 아래 스크린에는 코로나19 자가격리 대상자가 되었던 장애인의 이야기가 한창 상영 중이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과 두 발로 선 사람들이 모두 한 곳을 바라보고 있는 풍경. 날씨까지 돕는 자유롭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이지만 영상이 전하는 사실은 무겁기만 하다.

관람하기 위해 자리를 잡고 앉으려면 체온 체크와 마스크 착용이 필수다. 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펼쳐진 행사. 모두들 긴장을 놓지 않고 있는 듯한 모습이다. ⓒ소셜포커스
영상을 관람하는 관중들. 영상 속에서 자가격리가 끝난 장애인을 종사자들이 축하하는 장면이 흐르고 있다. ⓒ소셜포커스

무대까지 지그재그로 뻗어있는 경사로 덕에 휠체어를 타고도 스크린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거드는 사람 없이도 모두들 수월하게 갈 곳을 향하는 모습이다. 이곳을 개막식 장소로 택한 이유를 알 것 같다고 생각하는 찰나 '장애인 화장실은?' 의문이 든다. 쉽게 눈에 띄지는 않는다. 

거울벽 앞을 지나는 사람들. ⓒ소셜포커스

'나를 보라'는 메세지가 은박으로 만들어진 거울벽 위에 둥실 떠있다. 그 앞에 서서 구경하고 있자니 휠체어들이 기자의 앞뒤를 스쳐 지나간다. 장애인 인권 보장을 외치는 기자회견 장소 외에 이렇게 많은 휠체어 이용자들을 만난 적이 있었나…. 주위를 둘러보다 회견장에서 자주 본 듯한 휠체어 이용자에게 다가가 말을 걸어본다. 

"혹시 기자회견장에 자주 오시지 않으세요? 그 분 맞으시죠?"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다. 그러다 대뜸 "코로나 때문에 죽겠다"고 한탄한다. 이 날도 오전에 있었던 기자회견에 참석했다가 바로 공원으로 왔다고 한다. 점심도 못 먹고 이러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만나서 반갑다고 거듭 말한다. 할 말이 많으신 모양인데 말하는 게 불편한 분과의 대화가 처음인지라 잘 알아듣질 못해 죄송스럽다. 본인도 답답하신지 다음에 또 보자는 인사를 건네고 유유히 자리를 떠난다.

스텝으로 참여한 자원봉사자 황대연 씨. ⓒ소셜포커스

멋쩍게 광장을 헤매다 한 부스에 가까이 다가간다. 한 남자가 팜플렛을 가져가겠냐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마스크로 얼굴의 반을 가렸지만 드러난 눈에는 미소가 만연하다. 오늘 하루 봉사활동을 하게 되었다는 황대연 씨다. 어떻게 스텝으로 참가하게 되셨냐는 물음에 대연 씨는 대학 동기 중 근육병을 가진 중증장애인 친구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그 친구랑 졸업하고 나서는 서로 사는 게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요. 그러다 몇 년 뒤에 처음으로 접한 소식이 부고였는데... 장례식장에서 마지막으로 보게 되니까 마음이 되게 그렇더라고요. 인권운동에도 많이 참여하고 동료상담가로도 활동하던 친구였거든요. 자기 몸이 불편한데도 다른 사람들 돕기를 좋아하는 친구였어요."

남을 도우며 살던 친구를 자신은 돌아보지 못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아팠다는 황대연 씨. 장애인인권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에 친구를 기리는 마음으로 스텝으로 지원하게 되었다며 그는 밝지만 씁쓸한 웃음을 보인다.

대연 씨는 토요일에 상영한 '사랑하는 그대에게'라는 작품을 상영작 중 가장 추천한다고 말한다. 청각장애를 갖고 있는 어린이들의 이야기인데 보면 마음이 짠해질 거라고 덧붙인다. 부모님이 나이 들었을 때 자신이 돌봐줄 수 없으니 동생이 한 명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자녀와, 동생에게 무시를 당할까 자식은 한 명으로 족하다는 부모의 이야기에 감명이 깊었다고 가슴에 손을 얹는다. 아마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인물들의 속 깊은 말들이 세상을 등진 그의 친구를 떠올리게 했나보다.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피플퍼스트'의 부스. 발달장애인이 같은 사람으로서 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길 바라는 센터의 뜻에 동참할 사람을 모집하는 동시에 후원금도 모금하고 있다. ⓒ소셜포커스
부스 옆 놓여있는 피켓. 발달장애인의 투표 편의를 위해 그림 투표용지를 제작하라고 외치고 있다. ⓒ소셜포커스

발달장애인자립생활센터 피플퍼스트의 부스를 지나친다. 장애인 참정권 보장을 위해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열정적으로 발언하던 발달장애인 당사자 김대범 대표의 모습이 떠오른다. 배트맨, 어벤져스. 신박한 비유가 쏙쏙 박힌 우렁찬 구호에 항상 진지했던 기자회견 분위기가 즐겁게 풀어졌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생각에 혼자 마스크 뒤에서 미소 짓는다. 

찾아가는 장애인차별상담소 부스. 상담사를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제든 전화하라며 조용히 손을 뻗고 있다. ⓒ소셜포커스

'찾아가는 장애인차별상담소'는 다소 한산한 모습이다. 도착하기 전 이미 많은 사람이 왔다갔겠거니 짐작해본다.

피플퍼스트 소속 발달장애인들이 직접 꾸민 출품작 소개서가 가득한 벽. ⓒ소셜포커스

은박으로 된 벽 뒤편에는 피플퍼스트 소속 발달장애인들이 작품을 소개하는 글과 그림이 빼곡하다. 흑백 감성, 현대적인 디자인. 이미 잘 꾸며진 팜플렛을 손에 쥔 사람들도 그 앞에 서서 100% 수작업 포스터들을 유심히 훑어본다. 겨눴던 카메라를 내리고 슬쩍 다가가본다.

이효재 씨와 박세나 씨가 만든 포스터. 개막작 '김다예 선언'의 설명이다. ⓒ소셜포커스

"가족 관계에 문제가 많은 김다예 씨는 우울증이랑 공황장애랑 있습니다. 가족은 중요한 존재이지만 계속 좋은 관계로 지내기는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김다예 씨가 자기를 아프게 하는 것이 불쌍해 보입니다. 김다예 씨를 보니 영화 '조커'가 생각이 났어요. 김다예 씨도 조커처럼 강해지면 좋겠어요. 근데 대신 악당은 되지 마세요."

정신장애인 김다예 감독은 이번 영화제에 '김다예 선언'을 출품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에 대해 주변인들에게 나아가 가족에게 '커밍아웃'하는 과정을 담은 작품이다. 강해지는 대신 악해지지는 말라는 이효재 씨의 당부가 신선하다.

팜플렛 배포 부스 옆에는 감독들의 눈을 보고 직업을 짐작해보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다. ⓒ소셜포커스

팜플렛 부스 근처로 다시 돌아온다. 황대연 씨는 여전히 열심히 방문객들과 소통 중이다. 옆에 알록달록한 접착 메모지가 붙어있는 검은 팻말은 영화를 출품한 장애인 감독들의 얼굴만 보고 그들의 직업을 맞춰보는 작은 코너다. 그들의 장애는 뒤로 하고 포스터 새로 마주치는 눈빛에서 그들의 능력을 읽어보려 애쓴다. 기자는 한 감독의 눈을 보고 그가 수학교사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황대연 씨는 정답을 알려주진 않는다. 뒤돌아 팜플렛을 들여다보고나서야 조호연 감독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팜플렛 속의 그가 말한다.

"고등학교에서 간질 때문에 꼴등에서 2번째였어요. 외우는 과목은 빵점. 수학 덕분에 꼴등은 면했죠. 전 과목 다 못했는데 수학은 잘했어요. 국어, 윤리, 수학 빼고는 다 낙제."

'역시 수학자의 면모가 물씬 풍기더라니.' 직감이 틀리지 않았다.

팜플렛 부스 옆에는 '나를 보라'는 메세지가 쓰인 주머니를 직접 꾸며볼 수 있는 부스가 있다. ⓒ소셜포커스

때깔 곱게 잘 꾸민 주머니들이 바람에 팔랑거린다. 뉘엿뉘엿지는 햇빛을 받아 색감이 더욱 도드라진다.

발달장애인 중창단이 공연을 하고 있다. 식품용 투명마스크를 쓴 덕분에 공연에 집중한 표정이 생생하게 보인다. ⓒ소셜포커스

발달장애인 중창단이 개막식 전 막간 공연을 하고 있다. '조금만 도와주면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사에 맞춰 밝은 표정으로 공연에 임한다. 앞에서 지도하면서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던 선생님의 얼굴이 잊히지 않는다. 

무대 앞에 앉아 개막식을 준비하는 스텝이 꾸미지 않은 '나를 보라' 주머니를 매고 있다. ⓒ소셜포커스

어디에 앉든 영화제의 주제가 눈길을 끈다.

개막식을 앞두고 스크린 앞에 다시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 ⓒ소셜포커스

오후 6시에 시작하기로 했던 개막식이 30분 정도 미뤄졌다. 시간이 난 김에 주변에 앉은 이들에게 말을 붙여보기로 한다. 첫 번째 타겟은 화장실에 다녀오는 동안 물건을 맡아주었던 옆자리 여성 분이다.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트위터로 접했다던 그는 사회복지학과에 재학 중인 대학생이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여러 장애계 문제 중 여성장애인 성폭력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영화제에 들른 모든 사람들이 우리 모두 '동등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품고 돌아가길 바랐다.

헤어스타일이 눈길을 끌어 말을 걸어본 관객은 불광동에서 '트랜스'라는 카페를 운영하는 사장님이다. 그는 자신의 카페가 '차별없는가게'라는 자영업자 커뮤니티에 속해있어 영화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찾아왔다고 말한다. 발달장애인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쉬운 메뉴판을 만들고, 휠체어를 타고 편하게 올 수 있는 가게를 만들기 위해 회원들끼리 서로 의견과 정보를 주고받는다고 한다. 더욱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으나 곧 개막식이 시작할 눈치다. 가게에 꼭 들르겠다는 약속과 즐겁게 관람하라는 인사를 나누고 자리로 돌아온다.  

 ⓒ소셜포커스

 6시 반이 조금 지나자 드디어 개막식 행사가 시작된다. 사회자와 관계자가 무대에 올라 내빈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시각, 청각 장애인을 위해 수어통역과 자막이 동시에 제공된다. 행사장이 야외여서 음향이 외부 소음과 뒤섞이고, 수어통역사를 제외한 모두가 마스크를 쓰고 있어 발언자의 말이 간혹 잘 들리지 않는다. 보면서 들으니 비장애인도 한결 편하다.

개막식이 끝나고 트레일러가 상영되고 있다. ⓒ소셜포커스

주최측과 후원자들의 인사가 끝나고 본격적으로 상영작들을 소개하는 트레일러가 상영되기 시작한다. 이들 사이에 섞여 자리를 지킬까 하다 아직 만만찮은 일교차에 어깨를 떨며 혜화역 2번 출구로 발길을 돌린다. 열차 빈 자리에 앉아 다시 팜플렛을 꺼내든다.

"'장애인'으로 누군가를 지칭하는 순간 '배려', '지원', '복지'라는 단어로 연결됩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 케인을 짚는 사람, 행동이 도드라지는 사람과 마주했을 때, 사회에서 만나는 한 사람이기보다 장애인으로 먼저 인식되기도 합니다. '도와드릴까요?' 따뜻해 보이는 말이지만 한 사람에 대한 상상력을 제한해버리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이 질문에 담긴 의미가 그 사람을 향해 있는 것인지, 불편함을 느끼고 있는, 도덕적 인간으로서의 나를 향해 있는 것인지 돌이켜보며 스스로를 봐야합니다."

장애인을 만났을 때의 자신을 떠올려본다. 카페 자동문 앞에서 잠시 머뭇거리는 휠체어 이용자를 보고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던 순간이 문득 뇌리를 스친다. 다가가면 열리는 자동문인 줄 알았을 뿐 버튼을 찾기에 어려움이 없었다는 걸 깨닫고 이내 멋쩍어졌던 그 순간. 그 사람은 내 걱정스러운 눈빛에 어떤 기분이었을까. 도덕적인 시민이라면 으레 그래야하는 양 누군가를 은연중에 '나와 다른 사람',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바라보았던 자신을 반성해본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