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스부르크 가문 600년 매혹의 걸작들”
“합스부르크 가문 600년 매혹의 걸작들”
  • 양우일 객원기자
  • 승인 2022.11.15 07:3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 기념 전시회
미술, 공예, 갑옷 등 96점… 장애인 관람 접근성도 편해

 

합스부르크 600년 걸작의 매혹들
합스부르크 600년 걸작의 매혹들. ⓒ국립중앙박물관

일상에서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자극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유발한다. 평소 접할 수 없었던 다른 나라 문화에 대한 지적 관심이 한곳으로 쏠리고 있다. 우리나라와 관계없는 합스부르크 600년 매혹의 걸작에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다.

은둔자와 잠자는 안렐리카
은둔자와 잠자는 안렐리카. ⓒ국립중앙박물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을 찾았다. 소중하고 아까운 158명의 목숨이 사라진 이태원 거리를 지났다. 대통령실이 용산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을 중심으로 벌어지던 각종 시위는 용산으로 옮겨졌다. 경찰 버스와 경찰들이 시위를 통제하며 질서 유지를 하고 있다.

 

관람권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관람권을 구매하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소셜포커스

국립중앙박물관은 한국과 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하여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대표 소장품 전시회를 열고 있다. 이 전시회는 내년 3월1일까지 열린다.

국립중앙박물관은 장애인 접근성이 좋다. 서울지하철 4호선을 이용할 경우 이촌역 2번 출구 ‘박물관 나들길’에서 박물관 서문으로 연결된다. 엘리베이터는 이촌역 1번 출구, 이촌역 2번 출구 방향 ‘박물관 나들길’에 있다. 평일 오후인데도 줄을 선 사람이 많았다.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 대표 소장품 전시회는 특별전이라 관람료가 있다. 성인 1만7천500원이다. 장애인복지법에 따른 등록 장애인 및 동반 1인은 무료입장한다.

11
합스부르크 왕가 계보도.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왕가는 유럽의 역사에 가장 영향력을 끼쳤던 명문가 중 하나다. 13세기 신성로마제국 황제를 배출한 이후 15~20세기 초까지 600여 년간 신성로마제국과 오스트리아 영토를 다스렸던 황제 가문이다. 이번 전시를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합스부르크가의 연대기 정도는 미리알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합스부르크 제국 국기 국장 상징
합스부르크 제국 국기 국장 상징 - 두개의 머리가 달린 독수리 문양.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가문은 10세기경 스위스 산악지역의 작은 봉건영주에 불과했다. 11세기에 들어서자 스위스에 ‘매의 성’이라는 의미를 지닌 ‘합스부르크 성’을 쌓으면서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손이 독일 국왕으로 선출되기까지 했다.

로마신화 조각상
로마신화 조각상. ⓒ국립중앙박물관
기독교 역사와 성경을 묘사한 태피리스트 작품
기독교 역사와 성경을 묘사한 태피리스트 작품. ⓒ소셜포커스
아기예수와 동방박사
아기예수와 동방박사. ⓒ국립중앙박물관

1273년 합스부르크 가문의 루돌프 1세가 독일 선제후들에 의해 (신성)로마독일 왕으로 선출된다. 하루아침에 루돌프 1세가 독일의 황제로 등극하며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엿한 유럽의 왕가로 자리 잡았다. 이렇게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된 루돌프 1세부터 왕가의 계보가 시작된다.

15세기 말에 막시밀리안 1세가 합스부르크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에스파냐 왕실과 정략 통혼하여 영향력과 지배영역을 확대했다. 막시밀리안 1세의 손자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 때 제국은 최대 영역을 지배했다.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영역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영역. ⓒ국립중앙박물관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와 에스파냐(스페인) 왕을 겸했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은 동생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1세가 지배하는 오스트리아계와 아들인 펠리페 2세가 지배하는 에스파냐계로 나뉘어 졌다.

그림에 막 튀어나올거 같은 정물화
그림에 막 튀어나올거 같은 정물화. ⓒ국립중앙박물관

해가 지지 않았던 제국, 에스파냐계 합스부르크는 1700년에 카를로스 2세 때 소멸되고 말았다. 1806년 신성(神聖)로마제국은 해체된다. 프란츠 2세(오스트리아 제국 프란츠 1세와 동일인) 때다. 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에서 물러나면서 오스트리아 황제라 칭하며 합스부르크 제국은 지속 되었다.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는 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여 카를 1세가 퇴위하면서 1918년에 역사에서 막을 내렸다.

합스부르크 제국 성립과 해체(출처 나무위키)
합스부르크 제국 성립과 해체. ⓒ구글이미지

합스부르크(Habsburgerreich) 제국은 공식적인 국가명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통치한 영토를 의미한다. 제국은 이슬람교의 오스만 제국의 팽창으로 유럽 기독교 영토에 가해지는 위협을 방어하면서 생겨났다. 이렇게 개략적으로 학습한 역사 지식을 토대로 흥미로운 세계를 향해 더욱 세차게 빨려 들어간다.

합스부르크가의 갑옷들
합스부르크가의 갑옷들. ⓒ국립중앙박물관

‘합스부르크 가문, 600년 매혹의 걸작들’ 전시회를 통해 세계역사 교과서에서만 보았던 역사적 인물과 그림, 조각품을 직접 볼 수 있다.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화가 담겨 있는 15~20세기의 유물을 수집하여 정리해놓았다. 르네상스, 바로크 미술, 공예, 갑옷, 태피리스트(직물공예) 등 96점의 전시품을 통해 오스트리아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할 수 있다.

합스부르크제국 사람들 영상자료화면 일부
합스부르크제국 사람들 영상자료화면 일부. ⓒ국립중앙박물관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양 유화는 방금 찍은 사진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다. 화가의 붓은 섬세하고 세밀했다. 이름을 알 수 없는 황제와 왕비들의 초상화도 있다. 오스트리아를 절대주의적 근대국가로 확립시킨 마리아 테레지아(재위 1740~1780년)를 만날 수 있다.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오스트리아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 ⓒ국립중앙박물관
프랑스 루이16세의 황후 마리 앙뚜아네트
프랑스 루이16세의 황후 마리 앙뚜아네트. ⓒ국립중앙박물관

프랑스 루이 16세의 왕비가 되었지만 프랑스 혁명 당시 처형당한 마리 앙투아네트 등의 초상화도 직접 마주할 수 있다. 막 피어난 것 같은 꽃 정물화, 로마신화와 기독교 신앙과 관련된 그림과 조각 작품을 볼 수 있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촉각 명화도 제작되어 전시 중이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세심한 배려심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프란츠 1세와 시시(엘리자베트)황후(20세무렵) 초상화
프란츠 2세와 시시(엘리자베트)황후 초상화. ⓒ국립중앙박물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유럽에서도 고부갈등이 심했던 것 같다.

‘시시’로 불렸던 프란츠 2세의 아내는 본래 이름이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다. 이 여인은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와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고부갈등은 가족의 비극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마침내 제국이 해체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시시는 1898년 이탈리아 무정부주의자에게 죽임을 당했다.

프란츠 2세의 조카였던 오스트리아 황태자 프란츠 페르디난트 부부는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고 말았다. 사라예보 암살사건은 1차 세계대전 발발의 방아쇠가 됐다. 1914년 7월 28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했다. 4년 동안의 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제국은 패전과 함께 멸망했다. 유럽역사의 600년을 주름잡았던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렇게 자취를 감추게 됐다.

1892년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준 선물한 갑옷과 투구
1892년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준 선물한 갑옷과 투구. ⓒ국립중앙박물관

마지막으로 마주한 전시물은 갑옷과 투구였다. “어! 이거 우리나라 갑옷인데. 왜 여기에 있지?” 의아한 생각이 스쳤다. 설명을 자세히 읽어 보니 합스부르크 유물과 함께 전시되게 된 이유를 바로 알 수 있었다.

조선과 오스트리아는 1892년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 갑옷과 투구는 수교 당시 고종이 오스트리아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준 선물이었다. 2022년은 오스트리아와 한국의 수교 13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는 전시회를 통해 오스트리아 빈미술사박물관의 대표 소장품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합스부르크 가문의 600년 관람을 마무리한다.

카이자르가 갈리아전쟁에서 기록작품 승리 연작
카이자르가 갈리아전쟁에서 기록작품 승리 연작. ⓒ소셜포커스

합스부르크 제국의 몰락 원인은 외부로부터 가해지는 국제적 환경요인도 있다. 그렇지만, 학자들은 근친혼에 따른 유전적 결함이 크게 작용했다고 보고 있다. 유전적 결함으로 남자 후손은 제국을 제대로 운영할 능력이 부족했다. 제국은 해체 후에 부르봉 가문과 로트링겐 가문에게 넘어갔다.

13세기, 루돌프 1세가 독일의 황제로 등극하며 역사무대에 올랐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유럽의 유력한 제후 및 왕가와 정략결혼을 통해 가문을 대제국으로 성장시켰다. 그러나 근친혼을 선택한 폐쇄성으로 인해 유럽 최고의 명문가문이 사라지며 대서사의 막이 내렸다.

아침식사
아침식사. ⓒ국립중앙박물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