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일절 앞두고 제암리 3·1운동 유적지에서
삼일절 앞두고 제암리 3·1운동 유적지에서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3.02.28 1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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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운동이 가장 치열했던 화성
일제 참혹했던 제암리 양민학살 현장
제암리 삼일운동 유적지의 삼일운동 순국기념탑. ⓒ소셜포커스

휠체어 명소 탐방기

3·1절을 앞두고 화성 제암리를 방문했다. 이곳은 3·1운동 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항일 만세투쟁과 일제의 참혹한 만행이 서려있는 유적지다.

갑자기 총성이 한 발, 두 발

순간 회당은 사체의 사당.

그것도 모자라서 불을 지르는 자가 있었다.

바람은 윗쪽의 민가에도 불을 붙였다.

탄다, 탄다, 사십 호의 부락은

하나도 남은 것이 없이 탔다.

초가집의 불탄 자리에 서서

아직도 스며오르는 취기(臭氣)가 코에 맡아지지 않는가.

젖먹이를 안은 채인 젊은 어머니,

도망가다 넘어진 늙은이 등의 

까맣게 탄 참상(慘狀)이 보이지 않는가.

만일 이것도 수치로 삼지 않는다면,

저주받을진저, 동방 군자의 나라. (이하 중략)

위 글은 사이토 이사무(斎藤勇, 1887~1982) 일본 도쿄대 교수가 쓴 시 “어떤 살육사건(或る殺戮事件)”의 일부분이다. 원문은 59행에 이르는 장문의 서사시다.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기간 중 일본군들은 경기도 수원군(현재의 화성시) 향남면 제암리에서 29명의 주민을 참혹하게 살해하고 민가를 불태우는 등 3·1운동 최대의 만행을 저질렀다.

사이토 교수는 이 제암리 학살사건에서 자국의 군인이 저지른 만행함에 대한 비판과 처참하게 살해당한 한국인들에게 조의를 담아 그해 5월 “복음신보”라는 잡지에 발표하였다.

이 사건의 만행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같은 일본 지식인에 의하여 이런 시를 남기게 했을까?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학생과 군중들이 만세 시위를 하면서 3.1운동의 서막이 올랐다.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고하는 선언식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도시에서도 열렸다. 독립의지를 태우는 불꽃은 날이 갈수록 파급력이 커졌고 한달 이상 계속되면서 지방 농촌에까지 전국적으로 번져나갔다.

그런 가운데 화성(당시 수원군)에서는 3월 21일 동탄면에서 만세시위를 시작했다. 그리고 26일 송산면, 27일 서신면, 28일 송산면, 29일 양감면·태장면, 30일 안용면·태장면, 31일 향남면, 4월 1일 팔탄면, 2일 향남면 제암리의 횃불시위 등 화성 전역으로 이어졌다.

시위가 확산되자 일본 헌병들이 출동해서 칼을 마구 휘둘렀다. 시위대에 2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사태가 커지자 흥분한 주민들이 인근의 일본인 주택 등 불을 지르는 등 시위 열기가 고조되었다.

특히 4월 3일 우정·장안 연합만세시위는 수 천명이 모여 장터와 마을을 돌며 만세운동을 이어나갔다. 주민들의 만세 열풍과 항일시위는 4월 5일까지 계속됐다. 화성지역의 만세운동은 전국에서 가장 치열하고 공세적인 항쟁이었다.

이에 일본은 더욱 강경한 진압에 나섰다. 헌병과 경찰은 마을을 불태우고 지도자들을 검거하기 시작했다. 일본 군경의 폭압에도 주민들은 더욱 강력한 저항으로 맞섰다. 일부 주민들은 몽둥이를 들고 나섰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순사 2명을 몽둥이로 두들겨서 처단했다.

그리고 4월 15일이 되었다. 만세운동의 핵심 주도세력이 제암리에 있다고 판단한 일본은 아리타 도시오(有田俊夫) 헌병 중위가 지휘하는 부대를 제암리로 보냈다. 이들은 15세 이상의 남자들을 모두 교회당으로 모이게 했다. "만세시위에서 너무 강경한 진압으로 피해가 많이 발생한 것을 사과하러 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그러나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20여 명의 주민들이 교회당으로 들어가자 그들은 밖에서 문을 잠궜다. 그리고 불을 질렀다. 교회는 아비규환이 되었다. 창문을 부수고 탈출하는 사람에겐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19명이 교회당 안에서 사망했으며 2명이 탈출하던 중 사망했고, 가족을 찾아 교회로 달려오는 부인 2명도 총칼에 살해되었다. 총 23명이 사망했고 1명은 탈출에 성공했다.

다음날도 일부 군인들의 만행은 끝나지 않았다. 인근 팔탄면 고주리로 가서 화성지역의 천도교 지도자였던 김홍렬의 일가족 6명도 살해했다.

이러한 만행으로 순국한 주민들의 시신은 포대에 담긴 채로 인근 야산에 봉분도 없이 던져지듯 묻혔다. 일본은 희생자들의 묘지가 추모의 대상으로 남는 것은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화성의 삼일운동 흐름도, 상단은 한국의 만세시위 내용이고 하단은 일본의 폭력진압 과정. ⓒ소셜포커스

일제의 이러한 만행은 한국에 와 있던 캐나다 선교사 스코필드(F. W. Schofield)에 의해서 전 세계로 알려졌다. 그는 현장의 사진과 목격자의 증언을 담은 “꺼지지 않는 불꽃(Unquenchable Fire)” 이라는 보고서를 미국으로 보냈다.

일본은 이 사건으로 국제적 여론이 악화되자 학살을 지휘한 아리타 중위를 군법회의에 기소했다. 그러나 나중에 슬그머니 무죄를 선고했다. 그리고 근신처분으로 사태를 덮으려 했다.

이 사건을 폭로한 스코필드는 그 후에도 한국을 돕다가 조선총독부에 의해 강제 출국당했다. 한국은 그에게 1968년 건국공로훈장을 수여했다. ‘석호필’이라는 한국이름도 가진 그는 ‘3·1 운동 민족대표 제34인’으로도 불리며, 외국인 최초로 국립현충원에 안장되었다. 제암리에 가면 동상을 통해서 그를 만날 수 있다.

제암리는 그 후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대한민국이 건국된 이후에도 한참이 지나는 동안 그곳에 기념탑 하나 제대로 세우지 못했다. 1959년 유족들이 성금을 모아 작은 기념비 하나를 세웠을 뿐이다.

그런데 의외로 1965년에 일본에서 이 사건이 재조명되기 시작했다. 당시 일본 해외선교회 소속으로 한국을 방문한 오야마 레이지(尾山令仁) 목사가 유일한 생존자였던 전동례 할머니로부터 사건의 전말을 듣게 되었다.

큰 충격을 받은 오야마 목사는 귀국 후에 '제암교회 소타(焼打)사건 속죄 위원회'를 조직하고 일본 개신교인들의 속죄헌금을 모금하여 교회당 재건 및 추모시설 건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타진해 왔다.

일부 유족들은 일본에서 온 돈으로 교회를 짓는다는 게 내키지 않았는지 반대와 논란이 있었다. 그러나, 일본 교인들의 간곡한 속죄 요청으로 1969년 교회와 유족회관을 세웠다. 이 교회는 하늘에서 보면 3자와 1자가 나타나게 하여 3.1정신을 상징하였다. 적어도 일본 개신교계에서는 반성과 사죄를 위한 나름의 노력을 해온 셈이다.

우리 정부는 1983년에 이르러서야 이곳에 규모를 갖춘 기념탑 하나를 세우고 사적지로 지정했다. 그리고 또 14년이 지난 1997년에 문화재관리국 주도로 3.1운동 유적지 성역화 사업이 추진되었다.

1만7천여㎡의 제암리 성역단지 내에 1천300여㎡ 규모의 순국기념관과 여러 가지 상징물 등이 조성되어 2001년 3월 1일에 완공되었다. 순국기념관 뒷동산에는 당시 희생되었던 23인의 시신을 발굴하여 합장묘지에 안치했다.

3·1운동과 제암리 학살사건이 일어난지 82년이 지나서였다. 그동안 무덤도 없이 떠돌던 호국의 영혼들은 얼마나 외로웠을까?

제암리 3·1운동순국기념관의 모습과 주변의 조형물. ⓒ소셜포커스
순국기념관에 전시된 자료들. ⓒ소셜포커스
제암리 학살사건의 희생자 23인을 합장한 묘지. ⓒ소셜포커스

그런데 성역화 사업을 하면서 어이없게도 그 ‘사죄의 교회당’은 헐리고 말았다. 그 당시 중앙청(구 조선총독부 청사)을 철거 등 일제 잔재 청산 분위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시설물에서 일제 잔재란 구 중앙청과 같이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을 억눌렀던 건물 따위를 말할 것이다. 그런데 해방 이후 일본의 민간단체가 스스로 사죄의 뜻을 밝히는 차원에서 건립해준 상징물까지 잔재라고 볼 수 있을까? 사죄의 상징물이라면 그 자체로서도 충분한 보존가치가 있을 텐데 이를 일부러 없애버렸다니 너무 옹졸한 판단은 아니었을까? 이로 인해 당시 성금을 모아줬던 단체로부터 상당한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고도 한일간 과거사 문제가 나올 때마다 사과를 받았느니 못 받았느니 하는 것으로 이슈를 삼을 수 있을지 생각해볼 문제다.

“제암리 3·1운동 기념 유적지”를 방문하면 널다란 잔디광장을 둘러싸고 순국기념관, 제암리교회, 순국기념탑, 23인 순국묘지, 23인을 상징하는 조형물, 3·1정신교육관, 야외음악당, 스코필드 동상 등을 만날 수 있다.

순국기념관은 영상실과 제1전시관 및 제2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로비에는 2명의 경기도 문화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전문적인 해설을 통해 관람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제암리 3·1유적지는 경기도 화성시 향남읍 제암리 321~325번지 일대에 소재한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이동약자는 수인선 지하철 어천역이나 야목역에서 장애인콜택시를 이용하면 쉽게 방문할 수 있다. 어천역에서 20분 거리다. 지방에서는 수원역으로 와서 수인선을 타고 3구간만 지나면 어천역이다.

제암리31운동순국기념관(www.jeam.or.kr)은 홈페이지도 잘 갖추고 있다. VR영상 등 정보접근성도 우수하다. 특히 이 기념관은 2023년 1월에 공립박물관 평가인증제 우수기관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기념관에서 뒷동산의 순국묘지에 이르는 길은 심한 고도차에도 불구하고 갈지자(之)형 경사로를 갖추고 있어서 휠체어 장애인도 편리하게 올라가서 참배할 수가 있다.

순국한 23인을 상징하는 조형물. ⓒ소셜포커스
뒷동산의 묘지로 올라가는 계단과 경사로. ⓒ소셜포커스

그러나 이동약자를 위해 속히 개선해야 할 부분도 가끔 눈에 띈다. 스코필드 동상 주변 조형물에는 유익한 기록들이 많이 새겨져 있지만 휠체어가 출입할 통로는 없다. 한 뼘 정도 되는 단차 하나만 제거하면 되는데 너무 아쉽다.

순국기념과 교육관 앞으로 여러 가지 조형물이 있는 잔디광장이 펼쳐지는데 진입로에 10㎝ 높이에 불과한 경계턱이 장벽처럼 가로막고 있다. 3·1정신교육관 후문 출입구도 마찬가지다. 공공시설을 세우는데 이동약자의 입장을 조금만 더 이해할 수는 없을까?

화성시는 내년에 이곳을 “화성시독립운동기념관”으로 거듭나게 할 준비를 하고 있다. 사적지 정비와 신규시설이 들어설 예정이라고 한다. 사적지 정비공사를 하면서 이동약자 불편시설도 모두 정비되었으면 좋겠다.

스코필드 동상이 있는 스코필드 정원의 모습, 정원 안에는 돌벽에 새겨진 읽을거리가 많지만 유일한 통로는 단차로 가로막혀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다. ⓒ소셜포커스
순국기념관 앞에서 잔디광장으로 진입할 통로는 빈틈없는 경계석으로 휠체어 진입이 불가능하다. 그외에도 삼일정신교육관 후문 출입구도 경사로 구조임에도 단차로 인해 이동약자의 출입을 어렵게 한다.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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