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의 상징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애국의 상징 안중근 의사를 추모하며
  • 양우일 객원기자
  • 승인 2023.03.20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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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국일 3월 26일로 올해가 순국 113주년
2010년 국민성금 모아 40년 만에 재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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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안중근기념관에서 바라본 인왕산 모습. ⓒ소셜포커스

해방 78년이 지난 지금도 완전히 청산되지 않은 일제 잔재는 현대인에게 여전히 숙제다. 영원한 적도 우방도 없는 국제관계에서 일본에 대한 국민감정은 사안에 따라 용광로처럼 달아오르고 시베리아 얼음처럼 차갑게 식기도 한다.

대한민국 국민은 일본이 제국주의 침략에 대한 반성과 진정성 있는 사과를 하면 무엇을 더 달라고 하지 않을 정도로 쿨하다. 하지만, 현재까지도 일본은 사과와 반성이 그렇게 어려운지 역사를 왜곡하며 음흉한 속을 드러내고 있다.

기념관 앞 광장 돌에 새겨져 전시중인 안중근 의사 유필. ⓒ소셜포커스

3월은 일제강점기 극복과 독립을 남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시기다. 우리가 지금 풍요롭고 행복한 나라에서 사는 것은 선조의 피와 땀 덕분이다. 희생의 피가 지금도 이 땅에 흥건히 적시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독립을 위해 일로매진했던 그 어려운 시절에는 이념과 신분, 경제형편은 달라도 모두의 열망은 오직 독립 하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이념과 빈부와 귀천에 따라 같은 장면을 보고도 생각이 갈라진다.

안중근의사의 단지
안중근의사의 단지

3월 14일은 화이트데이인 줄 알고 있다. 그렇지만 3월 26일은 어떤 날인지 물으면 일부를 제외하면 “모른다” 일색이다. 정말 안타까운 현실이다. 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의 사형집행일, 즉 순국한 날이다. 세종대왕이나 이순신 장군만큼 우리나라 역사가 흐를수록 선명하게 기억될 인물이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경과 남산타워. ⓒ소셜포커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경과 남산타워. ⓒ소셜포커스

생각은 발길을 끌어당겼다. 승용차를 타고 남산 순환도로로 올랐다. 따뜻한 봄볕을 많이 쏘인 양지에는 개나리꽃, 진달래꽃이 이르게 피어 봄이 본격적으로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서울 하늘은 미세먼지와 매연이 섞여 뿌옇게 덮여 있다.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갔다. 참 오랜만에 찾아온 안중근의사기념관이다. 오랜 기억 속에 있는 한옥기념관은 없어지고 현대식 건물로 기념관을 재개관한 상태였다.

안중근의사기념관은 1970년 10월 남산의 현 위치에 개관했다. 이후 국민성금을 모금하여 국고 146억, 성금 34억 등 총 공사비 180억을 들여 2010년 10월에 현대식 건물로 새롭게 단장했다.

주차장에서 입구로 향하는 벽면에 새겨진 안중근 의사 유필. ⓒ소셜포커스
주차장에서 입구로 향하는 벽면에 새겨진 안중근 의사 유필. ⓒ소셜포커스

기념관은 지하 2층, 지상 2층 등 4층 건물이다. 주차장에서 보면 2층 건물로 보인다. 지하 2층은 강당, 지하 1층은 제 1전시실, 지상 1층은 제 2 전시실, 지상 2층은 제 3전시실 및 체험실과 추모실로 구성했다. 주차장까지만 오면 이동약자들도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관람할 수 있다.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의 대형 좌상
민족의 영웅 안중근의사의 대형 좌상. ⓒ소셜포커스

주차장에서 이동 경로를 따라가면 지하 1층으로 안내한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단지혈서를 배경으로 안중근의사의 대형 좌상이 있다. 30세 젊은 나이에 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사 좌상 앞에서 고개 숙여 추모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내부 전시실 모습. ⓒ소셜포커스

동상 옆으로 전시실 입구가 있다. 제 1전시실은 격동의 근세사, 안중근 의사의 출생과 성장, 가문에 대해 전시되어 있다. 당시 대한제국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시작하여 임오군변(1882년), 을미사변(1895년), 러일전쟁(1904년) 등 격변을 겪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침략을 노골화해 갔다. 선각자들의 구국을 위한 계몽운동과 의병투쟁에도 불구하고 대한제국은 사실상 식민지 상태에 놓였다. 이러한 혼돈의 세상에서 안중근 의사는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응칠(應七)이다. 안중근의사 가문은 항일독립운동 명문가로 15명이 독립운동에 대한 공로로 서훈을 받았다. 안중근의사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안중근 의사 활동도. ⓒ소셜포커스
안중근 의사 기념 엽서. ⓒ소셜포커스

제 2전시실은 독립운동과 관련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천주교에 입교한 안중근의사(세례명 토마스, 도마로 많이 알려져 있음)는 국내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을 전개하고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일제는 헤이그밀사 사건(1907년)을 빌미로 정미늑약(1907년)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하고 산림, 광산 등 국토를 수탈하기 시작했다. 안중근 의사는 현재까지 추진해 왔던 계몽 위주의 독립운동에 대한 한계를 인식하고 가문 전체가 해외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1909년 안중근 의사는 12명 동지들과 왼손 무명지를 절단하여 혈서를 쓰는 단지동맹으로 국권회복과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하기로 맹세했다.

하얼빈 의거 당시 안중근 의사가 사용한 권총. ⓒ소셜포커스

제 3전시실은 이토 히로부미 처단, 법정투쟁, 순국에 대한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안중근의사는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했다. 안중근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까지 얼마나 많이 마음 졸이며 기다렸을까? 불안한 마음과 초조한 심경을 어찌 참고 달랬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중근 의사가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것은 대한의군 참모중장, 즉 군인으로써 일제에 대해 독립전쟁 중인 사건이었다. 따라서 전쟁포로로 대우해야 하나 일제는 안중근 의사를 흉행자로 몰았다. 엉터리 재판 관할권을 주장하며 엉터리 재판을 전개하고, 엉터리 확정판결로 사형을 선고했다.

하얼빈 의거 후 호송되기 직전 안중근 의사 모습. ⓒ소셜포커스

전시실에 재판정을 재현해 놓았다. 방청석에 앉아 당시 상황 버튼을 눌렀다. 조명은 꺼졌으나 홀로 외롭지만 대한의군 군인의 기개를 잃지 않았던 의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재판과정에서 원흉 처단의 정당성과 동양평화를 위해 당당하게 변론하는 안중근 의사의 모습이 눈에 보이는 듯 했다. 가슴도 뭉클해 졌다.

안중근 의사는 상고할 수 있었음에도 공소권을 포기했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이니 비겁하게 살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이니라”는 말로써 자식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참담한 심정을 감추고 먼저 죽음을 맞이하는 아들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돌에 새겨진 안중근 의사 유필. ⓒ소셜포커스

안중근 의사는 옥중에서 안응칠역사와 동양평화론을 집필했다. 또 200여점으로 추정되는 옥중 유필을 남겼다. 현재까지 확인되는 것은 57점이다. 유필 중에서 위국헌신 군인본분(爲國獻身 軍人本分),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口中荊棘), 견리사의 견위수명(見利思義 見危授命) 등은 특히 좋아하는 경구로 삼았다.

유언을 남기는 안중근 의사. ⓒ소셜포커스

안중근 의사는 2월 14일 판결 선고를 받고, 1910년 3월 26일에 뤼순 감옥에서 사형이 집행되면서 순국했다. 순국한 그 해인 경술년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韓日合倂)되어 대한제국은 지도상에 사라지고 국민만 남았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36년의 긴 세월을 피지배인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다. 일제강점기를 견뎌낸 우리 민족은 현대 세계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길 만큼 성장했고 앞으로도 더 발전할 것이다.

안중근 의사 유필(위)과 훈장(아래). ⓒ소셜포커스

안중근 의사의 유필 중에 극락(極樂)이라 쓴 내용도 있다.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뤼순 감옥에서 재판받고 순국하기까지 그 짧은 기간은 정말 극락이었을까? 지금 우리나라 국민은 생각과 이념에 따라 흩어지고 갈라져 있다. 대한민국 국민이 안중근의사 순국 113주년을 기리며 마음이 하나로 모아지고 합쳐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3월에 이곳을 방문하고 국민으로서 국가와 민족을 위한 헌신을 한번 쯤 되새겨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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