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대왕 효심이 담긴 ‘수원화성(水原華城)’
정조대왕 효심이 담긴 ‘수원화성(水原華城)’
  • 염민호 편집장
  • 승인 2023.12.19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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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중기ㆍ활차ㆍ녹로 등 동서양 축성술 집약한 첨단 기술로 완성
정조, 탕평책으로 인재 등용… 조선 후기 문화 꽃피워
팔달산 정상에 세운 서장대(화성장대) ⓒ소셜포커스

두 주전쯤 쉬는 날 수원시에 다녀왔다. 이왕 가는 길에 시간을 앞당겨서 서너 시간 화성행궁 일대를 둘러보기로 했다. 우선 팔달산에 올라 서장대를 비롯해 주변 성곽길을 따라 화양루까지 갔다. 되돌아 내려오면서 화성행궁에 들어가 복원된 여러 전각을 구경했다. 

잘 알려진 내용이지만, 수원화성(水原華城)은 정조대왕이 오랜 세월 효심을 담아 조성한 도시다. 정조는 부친 사도세자가 세상을 떠난 이후 왕위에 오르기까지 숨죽여 가며 고통스러운 청소년기를 견뎌냈다. 할아버지 영조는 조선 역대 군왕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았다. 무려 81년 5개월에 이르는 생애는 역대 군왕 중 최장수를 누린 임금이다. 게다가 51년 7개월 동안 왕위를 지켰다.

영조는 선왕의 적장자(嫡長子)가 아니었기에 늘 적통성 문제에 시달렸다. 영조를 낳은 친모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영조는 특히 주변 인물에 대한 의심이 많았다고 알려진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배경에는 이런 점도 작용했으리라는 생각이다.

세손이었던 정조는 할아버지 뒤를 이어 왕위를 물려받았다. 영조와 정조 시대를 일컬어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로 부른다. 이 시기는 대체로 왕권이 굳건했기에 비교적 안정된 국정운영이 이뤄졌던 시기다. 특히 정조는 당파를 떠나 인재를 중용했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이는 등 실용적인 학문이 꽃을 피웠다.

당시 실학파를 대표하는 인물 가운데 정약용을 꼽을 수 있다. 정약용은 정조가 총애하던 인물이다. 또 수원화성을 축조한 책임자 가운데 한사람으로, 화성 축성 설계 등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정약용은 서양 기술을 토대로 거중기를 만들어 성을 쌓을 때 매우 유용하게 사용했다. 거중기뿐만 아니라 활차, 녹로 등 새로운 기재를 발명해 활용했다. 동서양 축성술을 집약한, 당시로서는 첨단 기술을 모두 동원했다.

수원화성을 쌓을 당시 군역에 동원된 사람에게는 수당을 지급할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요즘 개념으로 국방의무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는 일반 노역자들과 똑같이 수당을 지급했다. 수원화성 설계 및 축조 과정은 물론 사용된 예산에 이르기까지 상세한 기록을 ‘화성성역의궤’ 등 기록으로 남겼다. 이는 정조가 매사에 합리적인 국왕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수원화성 본 모습은 일제 강점기를 지나 6.25 사변에 이르기까지 역사 격동기에 그 자취가 상당한 부분 훼손됐다. 그러나 상세한 기록물을 남겼기에 오늘날 이를 다시 원형 그대로 복원할 수 있는 근거가 됐다.

서장대에서 내려다본 성곽길과 도심 풍경, 수원화성 정문인 장안문이 보인다. ⓒ소셜포커스

오래전 까까머리 중학생 때 수원화성을 처음 보게 됐다. 수원뿐만이 아니었다. 강화도 12진보(鎭堡)와 여기에 딸린 돈대(墩臺) 탐방을 다녀오기도 했다. 그 당시 강화도는 중요문화재 복원 공사가 이뤄지기 전이라 허물어진 성벽 위로 크고 작은 밭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몇 해 지나지 않아 강화도 12진보(鎭堡) 복원 공사는 마무리됐다. 당시 강화도 중요문화재 복원 공사 준공식에 대통령이 참석했다. 행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가던 대통령 차량 행렬을 구경했던 기억이 남았다. 이렇듯 무엇이든 좋아하거나 호기심이 밀려오면 집중하게 된다. 이런 상태에서 읽었거나, 보고 들었던 내용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수원화성을 처음 탐방했던 그때였다. 안양에서 수원으로 넘어가는 지지대고개에서 정조대왕에 얽힌 수원화성 이야기를 처음 접했다. 그 이후로 수원과의 인연은 계속 이어졌다.

장안문은 수원화성 북쪽에 자리한 북문이다. 그렇지만, 정조대왕이 행차할 때 처음 맞이하는 문이라서 수원화성 정문에 해당한다. 남쪽과 북쪽을 잇는 큰 문은 아직도 그 위풍당당한 느낌이 여전하다. 어린 날에 봤던 눈높이는 지금보다 더욱 낮았을 터였다. 서울 남대문과 달리 문 앞에 반달 모양으로 옹성을 두른 특이한 건축물이 매우 인상 깊었다. 어릴 때는 좀처럼 여행 기회가 많지 않았기에 새로운 풍경을 보는 즐거움이 매우 컸다.

이번에 수원을 다시 찾았을 때, 화성행궁 주차장은 그다지 넓지 않았다. 출입문 앞에서 길게 대기하다가 차량 서너 대가 빠진 후에야 주차할 수 있었다. 팔달산 정상을 향해 구불구불 잘 포장된 도로가 눈에 들어왔다. 포장도로보다는 화성행궁 담장 옆 계단을 따라 팔달산 꼭대기에 올랐다.

높은 화강암 기단 위에 세워진 누각에 ‘華城將臺(화성장대)’라 쓴 현판을 처마 밑에 높이 달았다. 바로 서장대다. 누각 안에도 정조대왕이 직접 지은 한시 액자가 걸렸다. 정조대왕이 이곳에 올라 군사 훈련을 지켜본 후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정본은 국립박물관에 있다. 복제본이지만 임금님이 직접 쓴 글씨체라 하니 더 각별하다.

수원화성은 전통 양식을 이은 성(城) 축조법과 근대 건축술이 혼합된 축성술을 사용했다. 커다란 화강암을 다듬어 쌓고 그 위에 흙벽돌을 구워 만든 검은색 벽돌을 정교하게 쌓았다. 지형지물을 이용해 침입하는 적을 쉽게 방어하도록 만들었다.

화성행궁 봉수당과 주변 전각이 보이는 풍경. ⓒ소셜포커스

정조가 도읍을 이곳으로 옮기려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러나 도읍을 삼을만한 규모는 아니다. 다만 부친 사도세자 능침이 가까운 이곳 화성행궁에서 어머니 혜경궁 홍씨를 위한 회갑연을 열었다. 또한 화성행궁 내 노래당(老來堂)이라 붙인 전각은 정조가 세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노년을 이곳에서 지내려 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러나 정조는 할아버지처럼 장수하지 못했다. 애석하게도 여러 역대 군왕처럼 48세라는 짧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조는 개혁과 대통합을 실현한 군주라는 평가를 받는다. 수원을 군사적 용도의 방어 도시로만 설계하지 않았다. 수원은 한양으로 올라오는 길목이라 물류가 모여드는 고장이지만, 자급자족하는 도시로 만들려고 했다. 영조에 이어 탕평책을 펼치며 인재를 고르게 등용했다. 이런 사실은 그들과 함께 이상적인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했음을 엿볼 수 있다.

성곽을 따라 걷는 길은 곳곳에서 위엄을 갖춘 건축물과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동쪽과 서쪽에 높은 장대를 세웠다. 남북을 지키는 ‘팔달문’과 ‘장안문’은 수원화성 중 단연 돋보인다. 중간에 각기 다른 특징을 보여주는 성루와 성곽 흐름이 매우 아름답다.

올해는 유난히 비가 자주 내렸다. 한 해를 마감하는 계절이지만 장마처럼 비가 쏟아지기도 했다. 이번 비 그치니 강추위가 바로 살을 파고든다. 그래도 날씨가 다소 풀리는 날에 수원화성 성곽길을 다시 걸어보면 어떨지 싶다.

반나절이면 한 바퀴 모두 돌아볼 수 있다. 틈틈이 시간을 낼 수 있다면 성곽 요소에 세워진 성문을 중심으로 하나씩 탐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하다.

화성행궁은 장애인 관람 편의시설도 무난해 보인다. 문턱을 넘을 수 있는 경사로 및 시각장애인이 이용할 수 있는 촉지 지도와 음성안내도 제공한다. 다만 고르지 않은 흙바닥과 쉽게 파이고 깎여나간 목재 구조물의 단차는 휠체어 이동에 불편함을 줄 수 있다. 이는 우리나라 고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문제점이다.

화성행궁 담장 옆 계단을 따라 팔달산 꼭대기에 올랐다. ⓒ소셜포커스
정조대왕이 직접 지은 한시 액자가 서장대 누각 안에 걸렸다. ⓒ소셜포커스

華城將臺 親閱城操 有詩題于 楣上(화성장대 친열성조 유시제우 미상)
화성장대에서 군사 훈련을 점검하고 지은 시를 문 위에 걸다.

拱護斯爲重 經營不費勞(공호사위중 경영부비노)
현륭원 호위 중요하지만, 세금과 노역 쓰지 않았네.

城從平地迴 臺倚遠天高(성종평지회 대의원천고)
성곽은 평지를 따라 둘렀고, 먼 하늘 기댄 장대는 높다랗구나.

萬投䂓模壯 三軍意氣豪(만투규모장 삼군의기호)
많은 성가퀴 구조 굳건하고, 군사들 의기 호기롭네.

大風歌一秦 洪日在麟袍(대풍가일진 홍일재린포)
대풍가 한 곡조 연주함에, 붉은 햇살이 갑옷을 비추는구나.

[정조대왕이 남긴 시]

서장대를 지키는 서노대 ⓒ소셜포커스
서노대에 대한 안내문 ⓒ소셜포커스
화성행궁 관람객이 정문 앞에서 펼치는 전통 무술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화성행궁 관람객이 정문 앞에서 펼치는 전통 무술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소셜포커스
수원화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소셜포커스
화성행궁을 지켜온 수령 600년이 넘을 것으로 추정하는 느티나무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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