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의사 구국정신을 간직한 “양재시민의숲” (하)
윤봉길 의사 구국정신을 간직한 “양재시민의숲” (하)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1.05.11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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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이기 전에 계몽 운동가이자 훌륭한 교육자였던 매헌 윤봉길 의사
양재시민의숲공원과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은 자연과 역사의 교육장
공원 남쪽 구역에는 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던 비극적 사건들의 위령탑
공원 내 위령탑 등 추모시설, 이동약자 접근성 보장 아쉬워

우리는 윤봉길 의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일본은 1931년 중국을 침략했다. 만주사변을 일으켜 한반도의 5배가 넘는 만주지방을 차지하고 만주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그 여세를 몰아 1932년에는 상하이 사변을 일으켜 주변의 중국군을 몰아내고 상하이에서도 주도권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고 일본은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에서 전승 기념 및 천장절(일왕의 생일) 행사를 성대하게 열었다. 윤봉길 의사는 수만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 행사장의 단상에 폭탄을 던졌다. 그곳에 있던 주둔군 사령관 및 주중공사와 거류민단장 등 군 관 민 수뇌부를 일거에 처단했다.

이 사건은 우리 민족의 항일독립운동사에서 너무나 통쾌한 의거였다. 우리는 윤봉길 의사를 이 의거의 주인공으로만 알고 있지는 않을까? 그러나 윤봉길 의사는 이보다 훨씬 위대한 사람이었다. 이번 편에서는 중국으로 망명하기 전의 윤봉길에 대해서 알아본다.

서울 서초구 양재동에 위치한 “양재시민의숲” 공원 안에는 “매헌윤봉길의사기념관”이 자리잡고 있다. 이 기념관은 우리 민족의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친 윤봉길 의사의 삶과 업적을 알리고, 농촌계몽과 의열투쟁을 통한 나라사랑 정신을 널리 선양하고자 건립했다.

기념관은 「사단법인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주관으로 국민성금을 모아 1986년에 착공을 했다. 1988년 12월 1일 준공하여 서초구에 기부 체납했다. 2016년도에는 서초구에서 국가보훈처로 소유권이 이관되었으며, 국가예산으로 새롭게 단장을 하여 2018년도에 재개관을 했다. 기념관의 운영은 사단법인 매헌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에서 하고 있다.

기념관은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지어졌다. 전시공간은 1층에 제1전시관과 제2전시관으로 구성되어 있다. 2층에는 기획전시실과 세미나실 및 사무실이, 3층에는 강당 및 교육실이 있다. 지하에는 매헌연구실과 자료실 및 수장고를 갖추고 있다.

제1전시실은 윤봉길 의사의 출생과 성장부터 칭다오 생활까지의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윤봉길 의사는 1908년 6월 21일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랑리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덕산면 시랑리에 남아있는 생가를 보면 그리 넉넉한 집안은 아닌 것 같다. 지금은 주변에 여러 기념 시설들이 세워져 있지만 윤의사가 태어난 초가집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층 중앙홀의 매헌 윤봉길 의사 좌상 ⓒ소셜포커스
1층 중앙홀의 매헌 윤봉길 의사 좌상 ⓒ소셜포커스
아름다운 숲의 둘러싸인 기념관의 뒷모습 ⓒ소셜포커스
지난 해 가을 아름다운 단풍 숲에 둘러싸인 기념관의 뒷모습 ⓒ소셜포커스
가을풍경과 윤봉길 의사 숭모비 ⓒ소셜포커스
가을풍경과 윤봉길 의사 숭모비 ⓒ소셜포커스
의사의 출생지와 출생 과정을 소개한 전시물 ⓒ소셜포커스
의사의 출생지와 출생 과정을 소개한 전시물 ⓒ소셜포커스

윤봉길 의사는 1918년 11세였던 해에 덕산공립보통학교(지금의 덕산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민족의식이 강했던 윤봉길은 불과 2학년 때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며 학교를 자퇴했다. 이 해가 1919년 삼일운동이 일어났던 해였다.

보통학교를 자퇴한 윤봉길은 14세부터 19세까지 매곡 성주록이 운영하는 서당인 오치서숙에서 공부했다. 비록 서당이었지만 성주록 선생 또한 민족의식이 강했고, 시대의 조류에도 밝아 신학문에 대해서도 매우 개방적이었다. 또한 제자들에게 여러 위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애국심을 고취시키며, 올바른 인격형성을 도모했다. 윤봉길은 성주록 선생으로부터 매헌이라는 호를 받았다.

매헌은 여기서 사서삼경을 모두 독파했으며, 실력과 기상을 고루 갖추어 연상의 학우들을 제치고 급장을 맡았다고 한다. 당시 매헌의 지적 욕구는 대단했다. 국내외 정세와 동향을 신문이나 신간 잡지를 통해 섭렵하는 한편, 신학문을 익히는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동아일보」와 「개벽」 등 신문과 잡지를 통해 새로운 사상과 신학문을 수용했다. 문학적 감수성도 풍부하여 「한시집」, 「임추」, 「옥타」 등 300여 편의 시문을 남겼다.

매헌은 1922년 중추절을 맞아 열린 시회(詩會)에서 인근의 쟁쟁한 유생들을 제치고 ‘학행’이란 시로 장원을 차지한 것을 비롯, 많은 글짓기 행사에서 장원을 휩쓸어 일대에 이름을 떨쳤다. 전시관에서 그의 「학행」이라는 친필 시도 볼 수 있다.

일제 식민지 교육이 싫어 자퇴한 매헌이었지만 큰일을 위해서는 일본어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16세 때 ‘일어속성독본’을 사다가 독학으로 일본어로 능히 대화를 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당시 매헌이 일어공부를 하자 사람들이 만류했지만, 매헌의 어머니는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 한다”면서 일어는 물론 일본 역사도 공부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사실 이때의 선견지명으로 매헌은 훗날 상하이 의거를 성공시켜 대한민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큰 인물이 된 것이다. 거사 당일 입장권이 없던 매헌이 훙커우공원 정문을 지키는 중국인 앞에서 유창한 일본말로 일본인 행세를 하여 통과할 수 있었다.

식민지 교육을 거부했던 윤봉길 의사 ⓒ소셜포커스
식민지 교육을 거부했던 윤봉길 의사 ⓒ소셜포커스
일제의 교육을 거부하고 새로운 스승을 만났던 오치서숙 ⓒ소셜포커스
일제의 교육을 거부하고 새로운 스승을 만났던 오치서숙 ⓒ소셜포커스
윤봉길 의사의 서당 책상과 시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학행」 시문 ⓒ소셜포커스
윤봉길 의사의 서당 책상과 시회에서 장원을 차지한 「학행」 시문 ⓒ소셜포커스
윤봉실 의사의 학문과 사상의 기반을 다진 학습 자료들 ⓒ소셜포커스
윤봉실 의사의 학문과 사상의 기반을 다진 학습 자료들 ⓒ소셜포커스

매헌은 자신의 학문이 어느 정도 완숙에 이르고 성인이 되자, 야학을 개설하여 농촌계몽운동에 나섰다.

매헌은 일제 치하에서 글도 배우지도 못하고 희망도 없이 살아가는 농민들의 피폐한 삶을 바라보며, 그들의 의식을 깨우는 것이 독립운동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이들과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의식을 깨우기 위해 자신의 집 사랑방에 야학당을 개설했다. 「농민독본」이라는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매헌이 직접 지은 농민독본은 「조선글」, 「계몽」, 「농민의 앞길」 등 3권으로 구성했다.

야학에서는 한글과 역사, 산수는 물론 영농지식까지 가르쳤다. 농민독본 2권에 나오는 조선의 지도와 동해 표기 등을 보면 지리도 가르쳤던 것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 농민들의 의식개혁과 소득증대를 위해 부흥원을 만들고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월진회를 조직했다. 체력단련을 위한 수암체육회도 결성했다.

서당에서 수년간 한학을 공부했고, 신식교육이라고는 초등학교 2학년까지가 전부였던 윤봉길 의사는 어떻게 의식개혁 운동과 신식교육에 역량을 발휘할 수 있었을까?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윤의사의 서당시절 스승이었던 성주록 선생 또한 단순한 서당의 훈장이 아니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매헌의 구국의지는 농촌계몽운동만으로 만족할 수는 없었다. 일제의 감시와 간섭 또한 윤봉길의 농촌운동과 민족운동을 그대로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1930년 매헌의 나이 23세에 보다 차원 높은 독립투쟁을 위해 긴 여정에 오른다. 중국으로 망명한 것이다. 이때 매헌은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 장부가 집을 떠나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라는 글을 통해 이미 조국독립에 목숨을 바칠 각오를 한 것으로 보인다.

지하철 신분당선 「양재시민의숲역」에 내리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이 글귀를 통해 조국을 위해 이미 목숨을 내놓은 윤봉길 의사의 정신을 느낄 수 있다.

기념관의 제1전시실에는 윤의사가 생존 당시 사용했던 생활유품과 직접 쓴 주요 시집, 야학교재로 직접 만든 「농민독본」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계몽운동을 추진했던 「부흥원」 공간에서는 ‘농민독본 검색하기’ 체험과 연극 ‘토끼와 여우’ 영상도 함께 감상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주요 유묵 작품, 가족에게 보낸 편지 등 윤봉길 의사의 유년기에서 중국 칭다오 생활까지의 농촌계몽운동가에서 독립운동가로 변화해가는 과정을 볼 수 있다.

전시관 중앙홀에 설치된 야학운영 기록화 ⓒ소셜포커스
전시관 중앙홀에 설치된 야학운영 기록화 ⓒ소셜포커스
매헌의 농촌계몽운동의 터전인 되었던 부흥원의 재현 모습 ⓒ소셜포커스
매헌의 농촌계몽운동의 터전인 되었던 부흥원의 재현 모습 ⓒ소셜포커스
매헌의 농촌운동 기록화 및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심정을 담은 어록 ⓒ소셜포커스
매헌이 청년들에게 강조한 어록을 새긴 조형물 ⓒ소셜포커스
매헌의 농촌운동 기록화 및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겠다는 심정을 담은 어록 ⓒ소셜포커스

 

공원 근처 지하철역(양재시민의숲역)의 윤봉길 의사 기념 조형물 ⓒ소셜포커스
공원 근처 지하철역(양재시민의숲역)의 윤봉길 의사 기념 조형물 ⓒ소셜포커스
매헌은 상하이로 가기 전 칭따오에 도착하여 1년을 보냈다. ⓒ소셜포커스
매헌은 상하이로 가기 전 칭따오에 도착하여 1년을 보냈다. ⓒ소셜포커스

「양재시민의숲공원」은 공원을 관통하는 매헌로를 기준의 북측 구역과 남측 구역으로 나누어진다. 지난 호에서는 북쪽 구역을 소개하였으므로 이번에는 남쪽 구역을 소개한다.

그런데 여기에는 한국의 현대사를 얼룩지게 했던 비극적 참사에서 희생된 영혼들을 위한 위령탑이 여러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로 사망한 희생자와 유족들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위령탑, 1987년 미얀마 안다만 해협 상공에서 있었던 KAL기 폭파사건의 희생자 위령탑 등이다.

1995년 6월 29일, 서울 서초동 소재 삼풍백화점이 부실공사 등의 원인으로 갑자기 붕괴되었다. 사망 501명, 실종 6명, 부상 937명으로 한국전쟁 이후 가장 큰 인적 피해를 낸 끔찍한 사고였다.

대단지 상가로 설계하던 것을 정밀구조진단 없이 백화점으로 변경되었고, 무리한 확장공사가 수시로 진행되었다. 여러 차례 붕괴 조짐에도 불구하고 응급조치에 그침으로써 결국 초대형 사고로 이어진 것이다.

1987년 11월 29일, 중동에서 출발하여 한국으로 돌아오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미얀마 안다만 해역 상공에서 갑자기 공중 폭파되었다. 이로 인해 탑승객 115명 전원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1987년 10월 7일 북한에서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할 목적으로 일으킨 테러였다.

이 같은 사고에 대해서 위령탑이나 추모비 등을 세우는 것은 희생자들의 혼령을 위로하려는 것이 목적일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이러한 시설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기억하게 하고, 재발 방지 등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기 위한 목적도 있다.

그러한 관점에서 공원에서는 위령탑 관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관련 사실을 알 수 있도록 기록물이나 홍보지 자료를 공원관리사무소 등에 충분히 비치해 놓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의 공원관리사무소에서는 그러한 자료를 구하기가 어렵다.

그 외 남측구역에서 눈에 띄는 시설로는 「유격백마부대충혼탑」이 있다.

1950년 10월 38선을 넘어 북진하였던 UN연합군이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밀려 철수하게 되었다. 이때 평안북도 정주군 박천군 일대에서 치안활동을 하던 청년들과 오산학교 학생들이 그해 11월 22일 유격백마부대를 조직했다.

김응수를 부대장으로 한 대원 2천600여명은 군번도 계급도 없이 무기도 열악한 가운데 압록강 및 청천강 하구 등에서 공산군을 상대로 500여 회의 교전을 치르면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3천여 명의 적을 사살하고, 1만8천여 명의 민간인을 구출하였으며 UN군의 정규작전에도 기여했다.

전쟁이 끝나고 이 부대의 생존 대원들이 매년 전국을 전전하며 추모 행사를 갖던 중 1992년 평안북도 출신 유지들의 성금을 모아 이곳에 충혼탑을 세우게 되었다.

많은 공원에는 충혼탑이나 위령탑 등 추모시설이 있다. 그러나 그러한 시설들은 대체로 휠체어 이용자 등 이동약자들이 접근하는 데 제한이 많다. 그냥 멀리서 외관만 바라보는 것은 지장이 없지만, 탑신 주변에 설치된 각종 기록물을 관람하거나 헌화 및 참배가 불가능하다. 대부분이 계단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탑신이나 본상 앞에까지 쉽게 접근이 가능한 경사로 구조를 갖춘 곳도 있기는 하지만, 흔치 않은 편이다.

그럴 때마다 휠체어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장애인은 역사 인물을 기리고 고인을 추모하는데도 차별을 받아야 하나?”라며 관계자들을 원망할 것이다. 공원이나 구조물 설치 관계자들의 인식개선이 시급하다.

그런 점에서 이 공원도 예외는 아니다. 다만 KAL기 폭파사건 위령탑의 경우 중간층까지나마 휠체어 접근이 가능하도록 경사로 구조로 설치된 것은 다행이었다. 다른 시설들도 참고가 되었으면 한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 위령탑과 삼풍 사고 유가족의 쉼터 ⓒ소셜포커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희생자 위령탑과 삼풍 사고 유가족의 쉼터 ⓒ소셜포커스
안다만 해협 상공의 KAL기 폭파사건 희생자 위령탑, 경사로 구조의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시설 ⓒ소셜포커스
안다만 해협 상공의 KAL기 폭파사건 희생자 위령탑, 경사로 구조의 휠체어 접근이 가능한 시설 ⓒ소셜포커스
휠체어 통행을 어렵게 하는 단차, 계단, 요철구간 등 ⓒ소셜포커스
휠체어 통행을 어렵게 하는 단차, 계단, 요철구간 등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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