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향이와 함께 다시 보는 광한루 (상)
춘향이와 함께 다시 보는 광한루 (상)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2.12.19 09: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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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상세계 구현하고자 했던 역사 속 광한루
소설 주인공을 현실로 불러낸 사랑의 터전
광한루의 설경(사진=남원시 제공)
광한루의 설경. ⓒ남원시

휠체어 명소 탐방기

전라북도 남원은 고전소설 속 주인공 춘향이 덕에 먹고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게다. 남원을 알리는 많은 공식 매체에서도 남원을 춘향골 남원이라고 표기한다.

남원의 명소이자 한국의 명소인 광한루원를 비롯하여 춘향테마파크 등 유형의 관광자산뿐만 아니라 남원시가 무형의 자산을 축적하는데도 춘향전이 미치는 효과는 지대하다.

명작 춘향전은 판소리로 진화하여 옛날부터 국악 공연예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현대에 와서는 영화나 드라마, 뮤지컬, 오페라 등의 다양한 장르로 꾸며지면서 국민들의 생각 속에 녹아 있다. 뿐만아니라 해외에 한국 문화를 알리는데도 일익을 담당한다.

더불어, 남원을 판소리의 고장이자 국악의 성지로 자리매김을 하는데도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이는 또한 국가무형문화재 안숙선과 같은 국가적 명창이 남원 땅에서 태어나게 한 바탕이 되기도 하였다.

춘향전은 18세기 무렵에 탄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정확한 연대와 작가를 알 수 없다. 조선의 18세기는 영조와 정조로 이어지는 조선의 르네상스 시대라고 부른다. 춘향전도 그 흐름을 타고 나타났다고 보는 것이다.

남원 부사의 아들 이도령과 기생의 딸 춘향이 광한루에서 처음 만나 정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남원 부사가 임기를 끝내고 한양으로 돌아가자 두 사람은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아쉬운 이별을 한다. 이도령 아버지의 후임 부사로 부임한 변학도는 춘향의 미모에 반하여 수청을 강요한다. 그러나 춘향은 정절을 앞세워 거절하다 옥에 갇혀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한편, 이도령은 한양에 가서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고 어사가 되어 남원으로 돌아온다. 변학도가 자기 생일잔치에서 공개처형을 하려는 찰나, 이몽룡은 암행어사 출도로 춘향을 구출하고 변학도를 봉고파직시킨다. 그리고 부부가 되어 백년해로를 한다.

그런데 16세의 이도령이 한양에 올라가 소과와 대과에 합격하여 어사급의 지위에 오르기까지 10년 이상의 세월이 걸릴 수밖에 없다. 반면에 이몽룡 아버지의 후임 변학도가 기생점고를 하고 마음에 드는 기생이 없어 춘향을 불러내 수청을 강요했던 시기가 변학도의 부임 초기다. 이몽룡이 떠난 지 불과 1년 이내일 것이다. 과거를 준비하던 어린 이몽룡이 서울로 떠나 1년도 안 되어 대과까지 급제하고 암행어사까지 되어 돌아온다는 얘기가 된다. 일부에서는 이러한 논리의 결함을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차피 소설은 흥미를 가미한 창작일 수밖에 없다고 보면, 춘향전은 조선시대 서민문학의 걸작이자 한국의 문학사에 길이 빛나는 명작임에는 틀림없다.

남원의 광한루는 이러한 춘향전에 나오는 공간적 배경의 한 부분에 불과하지만, 소설 속의 춘향이를 현실의 공간으로 끌어낸 유일한 곳이다. 이점이 바로 남원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광한루 하면, 가장 먼저 춘향전을 떠올리고 이도령과 춘향의 러브스토리를 연상할 것이다.

그러나 그 광한루의 창건 및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누각으로 자리잡기까지 세종대왕, 황희, 정인지, 정철 등 쟁쟁한 역사 인물과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 것 같다.

춘향관에 전시된 병풍 속의 춘향전 러브스토리 ⓒ소셜포커스
춘향관에 전시된 병풍 속의 춘향전 러브스토리. ⓒ소셜포커스
광한루 600년 기념 춘향영화제에 다시 나온 역대 춘향전 영화들. ⓒ소셜포커스
광한루원에 있는 춘향사당의 모습과 춘향이 영정 ⓒ소셜포커스
광한루원에 있는 춘향사당의 모습과 춘향이 영정. ⓒ소셜포커스
역사 속의 춘향전과 한국을 알리는 춘향전. ⓒ소셜포커스
광한루 뒤에 있는 안숙선 기념관과 춘향전 판소리 공연 포스터. ⓒ소셜포커스

사실 광한루의 역사는 춘향전이 나오기 훨씬 전인 1418년 세종대왕이 즉위하던 해부터 시작된다. 세종 시절 명재상이자 조선 역사상 최고의 재상이 될 황희가 충녕(세종)의 세자책봉에 반대하자 태종은 그를 남원으로 유배보냈다. 황희는 남원에서 귀양살이를 하면서 광통루라는 작은 누각을 짓고 자연을 즐겼다고 한다. 황희가 당시 유배자 신분이었음을 감안하면 광통루는 별 볼품이 없던 작은 누각이 아니었을까 싶다.

세종은 자신의 왕위계승을 반대한 황희였지만 즉위 후에는 그 능력을 인정하여 역사상 최고 기록인 24년간이나 정승(영의정 18년)으로 기용했다. 편견 없이 능력 중심의 인재관리를 한 성군의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세종대왕의 한글 반포시 ‘훈민정음해례본’의 서문을 쓴 것으로 유명한 대학자 정인지가 세종 26년에 전라도 관찰사로 왔다. 정인지는 이곳의 경치에 매료되어 남원 부사에게 누각을 다시 크게 짓게 하고 지금의 광한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광한루는 달나라의 궁전, 즉 월궁(月宮)으로 알려진 광한청허부(廣寒淸虛府)에서 따온 것이다. 광한청허부는 당나라 현종이 상상 속에 월궁에서 놀았는데 그곳의 명칭이 “광한청허부”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정인지가 광통루를 광한루로 바꾼 것은 이곳을 지상의 한 공간이 아닌 우주의 한 공간으로 개념을 승화시킨 것이다.

광한루는 넓을 廣에 차가울 寒을 써서 넓고 시원한 곳이라는 의미도 된다. 초선 초기의 명문장가 강희맹은 이곳을 방문하여 소감을 편액으로 남겼다. “6월(음력이므로 한여름에 해당)에 방문했는데 가을 기운이 뼛속에 스며드는 듯 하다”고 했다. 광한루의 의미를 이보다 더 실증적으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100년이 훨씬 지난 선조임금 때, 조선 가사문학의 최고봉으로 국문학사를 빛낸 송강 정철이 관찰사로 왔다. 그는 남원 부사 장의국에게 광한루를 보수하고 지리산에서 흘러와 광한루 앞를 지나는 요천의 물을 끌어들여 지금의 연못을 만들게 하였다. 연못을 은하수로 상징하여 오작교를 세우고 인공섬을 조성했다. 달 속의 궁전이라는 광한루와 함께 천상의 이상세계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때 조성된 수로는 지금도 끊임없이 요천의 맑은 물을 끌어들이고 흘려보낸다. 그래서 은하수 연못은 물이 고여있는 다른 호수나 연못과 달리 항상 최고급 청정수를 유지한다.

오작교는 하늘나라에서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애절한 사랑을 나누는 견우와 직녀가 1년마다 딱 한번 만날 수 있도록 까마귀와 까치들의 희생을 통해서 만들어주는 다리다.

오작교(烏鵲橋)의 烏는 까마귀 ‘오’, 鵲은 까치 ‘작’이다. 오작교가 열리는 날은 음력 7월 7일, 칠석날이다. 견우와 직녀가 오작교를 통해서 사랑을 나누었듯 이몽룡과 춘향도 오작교에서 신분을 뛰어 넘는 러브스토리를 이어갔다.

연못 가운데 3개의 인공섬은 전설의 삼신산을 뜻하는 봉래섬·방장섬·영주섬이다. 봉래섬은 금강산을, 방장섬은 지리산을, 영주섬은 한라산으로 상징하기도 한다.

이 미니 섬에도 누각과 정자가 있다. 영주섬의 영주각과 방장섬의 방장정이다. 이 누정들은 수백 년의 나이테를 품고 있는 주변의 수목들과 함께 방문객들의 탄성을 유도한다.

전라도 관찰사의 감영은 전주에 있었는데 감영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남원까지 관찰사들이 와서 광한루 가꾸는데 정성을 쏟은 것을 보면 남원의 광한루 주변이 예사로운 곳은 아니었나 보다.

이런 역사와 유서를 간직했던 초기의 광한루 건물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에 의해 소실되었다. 왜란 전반기 왜군들은 평안도·함경도까지 진출했지만 이순신 장군의 대활약과 진주대첩으로 인한 진로 차단 등으로 곡창지대인 호남 공략에는 실패한 왜군들이었다. 그랬기에 후반기 정유재란 때는 전라도 공략을 위해 남원 쪽으로 전력을 집중했다. 6천의 남원 주민들과 4천에 불과한 조명연합군은 물밀 듯이 몰려오는 5만 6천 왜군들의 잔인한 보복전에 모두 희생되었다. 그리고 남원은 완전히 잿더미가 되었다. 그때 광한루도 사라진 것이다.

남원의 호국성지 만인의총(萬人義塚)에는 그때 순절한 민·관·군 1만의 얼이 잠들어 있다.

그리고 광한루는 1638년(인조 16)에 남원 부사 신감에 의해 복원되었다. 전후의 피폐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불과 30년 만에 복원한 것이다. 관아건물이 아닌 여가시설임에도 매우 빨리 복구되었다. 그만큼 광한루의 의미가 각별하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광한루 건물은 일제 강점기에도 수난을 피해 가지 못했다. 일제는 강제병합 이후 이곳을 10여 년간이나 재판소 건물로 사용했다. 그리고 누각 1층을 감옥으로 개조하였다. 우리 조상들이 천상의 세계를 구현하고자 했던 지성의 공간에 우리 민족을 억압하는 시설을 덧씌웠다. 민족의 정신문화 말살을 위해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된 것이다.

지금도 누각의 기둥마다 감옥으로 개조하기 위해 철창을 설치했던 그때의 상처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광한루는 1963년 국가보물 281호로 지정되었고, 이 광한루를 품고 있는 7만여  m2의 광한루원은 사적 303호로 지정되었다. 보물과 사적지로 지정하면서 주변을 정비하였다. 완월정, 월매(月梅)의 집 등 다수의 건물도 들어섰다. 그리고 2008년에는 역사문화경관 국가명승지로 지정되었다. 광한루원에서는 매년 단오절에 춘향제가 열리고, 2019년도에는 600주년 기념행사도 열렸다.

은하수 연지를 가로지른 오작교와 광한루의 모습. ⓒ소셜포커스
광한루의 누마루 모습과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본다는 계관(桂觀) 편액. ⓒ소셜포커스
광한루의 누마루 모습과 달나라의 계수나무를 본다는 계관(桂觀) 편액. ⓒ소셜포커스
지리산에서 발원한 요천의 맑은 물을 끊임없이 연지로 끌어들이는 수로. ⓒ소셜포커스
수중누각 완월정의 모습. ⓒ소셜포커스
광한루원의 설경. ⓒ남원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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