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를 뛰어 넘는 도전과 성취의 기쁨…
장애를 뛰어 넘는 도전과 성취의 기쁨…
  • 서용수•김상자 부부
  • 승인 2018.12.27 11:58
  • 댓글 3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애인 가정으로 겪었던 어려움 및 극복과정, 변화된 이야기

부산에서 가난한 집안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야간 중학교를 졸업 후 집안 살림을 돕기 위하여 열여덟 살에 철공소에 들어가 기술을 쌓았습니다. 몇 년 뒤 울산의 한 중소기업에 스카우트되어 20여 년간 직장생활을 했습니다. 이후 공장을 차려 고생하다가 8년 반 만에 안정된 생활을 갖게 되었습니다. 25살에 아내를 만나 딸 셋, 아들 하나를 낳고, 일 또한 안정되자 이제 행복하게 잘 살 일만 남았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91년 5월 12일 안개가 짙은 편도 일차선 커브 길에서 갑자기 버스가 제 앞에 확 나타나 순간 충돌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우측으로 돌렸고, 그 충격으로 차와 함께 3미터 아래 하천에 떨어졌습니다. 정신을 차려보니 부산 백병원 중환자실에서 아내는 울고 있었고, 저는 온몸이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되어 있었습니다.
목뼈에 금이 생겨 고정치료를 위해 머리에 핀을 박고, 투구를 씌워 그 끝에는 추를 매달았습니다. 척추 11, 12번이 내려앉아 등 안쪽에 쇠막대가 삽입되어 몸은 특수 회전침대에 벨트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발가락에 감각은 없고, 움직일 수도 없었으며 간호사가 두 시간마다 침대를 돌리면 오직 천장과 바닥만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내는 저의 회복을 위해 8개월 동안 병원과 울산 집을 오가며 신경 회복에 좋다는 것들을 수소문하여 먹이며 밤낮없이 간병에 매달렸고, 마침내 퇴원하는 날이 오게 되었습니다.
휠체어를 타고 가다가 아내의 등에 업혀 가기도 하며 힘들게 집으로 돌아왔으나 마당의 재래식 화장실은 갈 수조차 없었습니다. 마루와 방 사이의 턱은 너무나 높아 보여 마치 창살 없는 감옥에 있는 기분이 들어 죽고 싶었으나, 죽을 수조차 없는 현실이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아내 또한, 죽고 싶을 만큼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을 것입니다.
꼼짝할 수 없는 저의 시중에 아이들 뒷바라지, 집안 살림까지 전부 아내의 몫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특히, 목욕탕에 갈 때 가족탕은 2, 3층에 있어 저를 업고 계단을 오르내렸을 때는 얼마나 눈물을 훔치며 이를 악물고 있었을지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너무나 아픕니다.
‘매일 이렇게 계속 무기력하게 도움만 받으며 살 수는 없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생각으로 지금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습니다. 마산 진동까지 오가며 장애인 운전면허를 취득한 뒤 핸드컨트롤이 장착된 승용차를 구입하였고, 휠체어도 활동하기 편안한 것으로 교체하여 아내를 태우고 나들이도 다니며 조금씩 생활에 활력이 생겼습니다.
집과 공장을 판 돈과 보험금을 합쳐 울산 변두리에 편의시설을 갖춘 집을 짓고 아내에게 시내 중심가에 찻집을 마련해주어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울산광역시지체장애인협회에 등록하여 장애인 복지 활동에 참여하면서, 휠체어 장애인이 할 수 있는 봉사를 고민하다가 차량 봉사가 가능함을 인지하여 곰두리 차량 봉사대를 결성했습니다. 이후 저와 대원들의 사비를 들여 어려운 장애인 병원 방문 및 나들이, 수험생 차량 봉사, 장애인 체전 참가선수 수송 등 봉사활동으로 그 공을 인정받아 1998년 ‘울산광역시 봉사 대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즈음 IMF의 여파로 아내의 가게 운영이 어려워져 가게를 접고, 파출부, 대리기사, 식당 설거지 등 온갖 일을 하며 홀로 고생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봉사에 매진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홀로 갖은 고생을 하고 있다 보니 부부싸움을 크게 하는 날도 많았고, 아내는 이혼도 생각했지만 아이들을 위해 이를 악물고 참고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아내의 고생을 고스란히 보고 있던 저는 가정에 도움이 되기 위해 봉사대를 떠나 장애인 보호작업장에 취업을 하게 되었습니다.
2002년 11월부터 작업장에서 근무하면서 고졸 검정고시도 합격하고, 사회복지사 양성과정도 수료하여 사회복지사 자격증도 취득하였으며, 가장으로서 적지만 가정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정년까지 열심히 일했습니다.

2009년 정년을 앞두고 택시 면허증을 취득하여 퇴직한 뒤 택시회사에 취업하여 7년간 택시운전을 하여 개인택시 자격을 취득하였으나, 아내의 만류로 핸들을 내려놓았습니다. 
2018년 8월 현재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울산광역시지체장애인 문화센터에서 서예와 통기타를 배우며 문화생활을 즐기게 되었습니다. 아내 또한 장애인 콜 택시기사로 일하다가 퇴직 후, 마당의 텃밭을 가꾸며 소소한 재미를 느끼면서 지내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바르게 잘 자라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에 취업도 하였고, 결혼하여 잘 지내고 있습니다.
내가 건강해야 가족이 행복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휠체어 장애인이 할 수 있는 운동을 찾다 휠체어 마라톤에 도전하여 5km를 시작으로 하프, 풀코스 완주 후 2008년 푸르메재단, s-oil 후원과 서울국제휠체어마라톤 조직위의 추천으로 독일 베를린 마라톤에도 참가하게 되어 풀코스를 완주하였습니다. 
2018년 4월에는 70세의 나이에도 굴하지 않고 서울국제휠체어마라톤대회 5km 부문에 참가하여 완주하여 가족과 제 자신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게 되어 삶이 더욱 활기차게 되었습니다.
지금의 이 모든 행복은 그 힘든 시기에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아내의 노력과 헌신, 사랑의 결실이라 생각합니다. 아내에게 너무나 감사함을 느끼는 만큼 더욱 사랑하며 행복하게 잘 살아보려고 합니다.

서용수•김상자 부부
서용수•김상자 부부

❖우리 가정의 현재와 미래
일상생활에 있어서 부족하고, 불편한 부분이 많지만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더 이상 크게 아프지 않기를 바라며, 지난 4월 70세의 나이에 서울국제휠체어마라톤대회에 참가했듯이 꾸준한 자기관리로 내년, 후년 계속 휠체어마라톤대회에 참가하여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하면 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하프, 풀코스에 또 한 번 도전하고 싶습니다.

❖우리 가정의 자랑
휠체어 장애인으로 할 수 없다는 생각이 아니라 ‘생각을 바꾸면 새로운 것이 보이고, 안 하는 것이지 못 하는 것은 없다.’라는 좌우명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열심히 생활하는 모습에 가족들이 자극을 받아 힘들지만 밝게 살기 위해 노력하고, 포기하기보다는 희망을 가지고 긍정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주변에서 말하는 우리 가정
아내에게는 남편을 돌보면서 아이를 돌보고 집안일에 바깥일까지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저에게는 몸에 장애가 있는데도 어쩜 저렇게 많은 일을 하고 열심히 생활할까 등등 많은 이야기를 하시며 부부가 둘 다 너무 대단하다고들 많이 이야기하십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3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임*희 2019-01-02 10:15:56
저희 가정에도 사고로 전신마비 상태의 환자가 있습니다
남 일 같지않아서 찡한 마음으로 읽다보니 정말 대단하십니다
모든것이 마음 먹기 나름이라지만 실천하기 쉽지않은데 몸소 실천하시니 응원의 박수를 보냅니다
쭉 건강하시고 하시는 모든일 모두 소원 성취하십시요~^^

하*필 2019-01-01 07:18:54
새해아침에 좋은글 읽었습니다. 이제는 앞으로 행복만 넘쳐나시기를 기원합니다. 나의생각

윤*진 2018-12-29 16:56:43
수많은 어려움을 잘 이겨내시고 지금의 위치에 오르신 두분께 박수를 보냅니다.
앞으로 좋은일만 있길 기원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