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자 이익으로 변질된 장애계 ‘정의(正義)’
강자 이익으로 변질된 장애계 ‘정의(正義)’
  • 윤현민 기자
  • 승인 2022.09.23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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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현민 기자
윤현민 기자

요즘 어딜 가나 상식과 공정, 정의 타령이다. 비단 정치판에서나 들을 법한 단어들이 아니다. 장애계 역시 ‘차별 없고 정의로운 세상’을 강조한다.

물론 모두가 지향하는 ‘정의’는 실현돼야 마땅하다. 평등하고 차별없는 개념인 만큼 재론의 여지가 없다. 상식, 공정과도 맥을 함께 하는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하지만, 가짜 정의로 그 실체를 왜곡하면 얘기는 달라진다. 소위 ‘정의팔이’로 개인이나 특정집단의 실속만 챙기는 경우다.

일부는 지하차도를 독차지하고 농성을 벌이며 ‘정의’를 자처한다. 불법 컨테이너로 건물을 막아선 채 몽골텐트로 진을 치기도 한다. 이곳을 지나는 시각장애인의 통행 안전은 안중에도 없는 모습이다. 컨테이너 연결 철제 기둥에 부딪힐 위험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다. 스스로 정당한 명분을 주장하며 양해를 강요하는 식이다.

바쁜 아침 출근길 시민 발목을 잡는 경우도 허다하다. 지하철을 멈춰 세우고 버젓이 장애인 권리투쟁을 외친다. 사다리에 몸을 끼워 쇠사슬을 동여매 비장함까지 연출한다. 그새 열차는 20~40분 지연출발하며 승객들 원성이 쏟아진다. 이렇게 시민 불편을 강요하며 일상을 할퀴어도 이들 시위는 정의로 둔갑된다.

오히려 불법시위를 단속하는 경찰을 ‘불의’로 규정한다. 해당 단체 대표는 최근 한 라디오 인터뷰에서 “일방적으로 집행되는 법 집행이 과연 정당하고 정의로운가”라고 되물으며 “헌법의 권리조차 보장받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 누가 법과 원칙에 따라 해결할 것인지 자문하길 바란다”라고 말했다. 

정의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독점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누구에겐 ‘정의’이면서 또 다른 누구에겐 ‘불의’일 수 있을까? 모두에게 공통적인 상식의 개념이라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다. 각자 정의를 다르게 해석하는 순간 이미 객관성을 잃어서다. 저마다 주장하는 정의들이 뒤엉켜 혼란과 분열만 자초할 뿐이다.

이쯤 되면 편향된 논리에 빠진 ‘정의 지상주의자’라 할 만하다. 자신들만의 정의 구현(?)에 혈안인 것 같아 안쓰럽기까지 하다. 이제 자신들의 그릇된 정의의 관념과 폐쇄성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적 약자를 가장한 ‘강자’임을 자인하는 꼴이다. 일찍이 고대 그리스 철학자 트리시마코스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으로 봤다. 정의의 본질을 왜곡해 자신의 기득권 보호수단으로 활용한다는 얘기다.

사회 변화를 위해선 시대 흐름과 호흡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민 동의와 참여 없는 장애인 권리투쟁은 ‘제 살 깎아먹기’다. 일반 대중의 전체 장애인에 대한 불신과 증오만 증폭시킨다. 또, 초창기 장애인 권리투쟁 노력도 자칫 물거품이 되기 십상이다.

더 이상 사회적 합의 없는 정의를 일반에 강요하는 일은 없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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