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가정’을 세워가는 기쁨…
‘아름다운 가정’을 세워가는 기쁨…
  • 김용 • 황정현 부부
  • 승인 2018.11.14 15:25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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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 가정으로 겪었던 어려움 및 극복과정, 변화된 이야기

정연상 情緣賞 [보건복지부장관 표창] 수상자 김용•황정현 부부
▲김용•황정현 부부
▲김용•황정현 부부

한국지체장애인협회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헌신적인 삶으로 귀감이 되고 있는 모범장애인 부부의 노고를 치하하기 위해 10월12일(금) 여의도 GLAD호텔에서 모범 장애인 부부 47쌍을 초청해 ‘2018 전국장애인부부초청대회’를 개최했다. 이 대회 최고 영예의 상(가연상)을 수상한 이귀만 박점순 부부의 수기를 지면을 통해 소개한다. [ 편집자 주]

세상의 빛을 본 지 1년 만에 양쪽 다리에 소아마비를 갖고 태어났다는 사실은 내가 가족들로부터 외면받는 삶을 살게 했다. 내가 ‘장애’라는 말의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어머니가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아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었고, 군인이었던 아버지는 이러한 힘든 상황을 회피하듯 가정을 등지고 매일 술 없이는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물론 이 모든 일은 나의 장애로부터 비롯된 일이다.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함께 단란한 가정에서 평범하게 자랄 수 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장애는 그 평범함을 허락하지 않았다. 내가 어른이 되고 지난 일들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기까지 난 고아로 자랐다.
특수학교인 대전성세재활학교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나는 홀로 살아가기 위해 학업보다는 기술을 먼저 택할 수밖에 없었다. 목공예, 전자기기 등의 기술을 익히고 취업을 하여 돈을 벌었지만 배움에 대한 갈망으로 학업을 이어가고자 노력했고, 일이 끝나면 책을 찾아보는 주경야독으로 중학교 과정을 검정고시로 졸업하게 되었다. 

고등학교 또한 일요일에 다닐 수 있는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다. 물론 일과 학업을 병행하였기에 남들처럼 제때 입학과 졸업을 한 건 아니었다. 수원의 한 전자업체로 직장을 옮기게 되어 학업을 중단해야만 했던 적도 있었고, 생활비를 제외하면 수업료가 모자라 다음을 기약했던 적도 많았기 때문이었다. 고등학교과정까지 무사히 마친 내가 대덕대학 사회복지과를 졸업하고, 한밭대 경영학과로 편입하여 학업을 이수했을 때에는 내 나이가 43세였으니 내 학업에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다.
이전에 성세자립원에서 학생들에게 기술을 전수해주던 나는 1999년 겨울, 같은 법인의 대전시립장애인복지관에서 어엿한 사회복지사로 일할 수 있게 되었다. 주로 내 전공이었던 직업훈련, 사회적응훈련, 직업적응교육, 취업처 알선 등 직업재활업무를 맡았다. 그리고 그 와중에 교육생으로 와 있던 아내도 알게 되었다.

목발에 의지하고 있는 내 몸 상태를 잘 알기에 당시 나는 정신연령이 약 7세 수준인 아내를 바라보며 느낀 사랑의 감정을 억누르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미래의 고난과 어려움에 대한 생각보다 현재 느끼고 있는 나의 감정은 마치 어떠한 불가항력의 힘에 빠져든 것처럼 제어하기 힘들어졌다. 그렇게 연애를 이어오던 우리는 처갓집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만난 지 2년 만에 결혼에 골인하게 되었다. 몸이 불편한 내가 과연 아내를 잘 보살필 수 있을지 의구심을 가지고 계셨던 장인, 장모님에게 더 잘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결혼 이후 부단히 노력하고 열심히 살았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인지, 아니면 시간이 해결해 주어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대하기 어려웠던 처가 식구들도 점차 내게 마음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결혼식을 올린 지 불과 4년 만인 2008년, 10년간 정들었던 복지관을 퇴직하게 되면서 큰 어려움에 봉착했다. 퇴직 이후 1년 동안은 국비지원교육인 ‘장애인 전문인력 양성교육’을 받으며, 사무자동화 산업기사, 컴퓨터 그래픽스 운용기능사, 정보처리기능사 등 당시 유망 직종이던 컴퓨터 관련 자격증을 수집했다. 그리고 자신감 있게 전문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직장을 알아보았지만, 취업의 문은 생각보다 좁았다.
천신만고 끝에 유성구장애인복지관에서 교육생들에게 컴퓨터 기초와 워드, 엑셀, 파워포인트 등을 가르치는 시간제 강사로 일하게 되었지만, 내가 꿈꾸던 일자리가 아니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것은 보람 있고 즐거운 일이었지만, 기간이 짧고 단편적인 시간제 강사의 특성상 혼자가 아닌 나의 가족에게 안정적인 생활비를 보장해 주지는 못했다. 이때부터 일정치 않았던 벌이가 내 발목을 잡았고, 결국은 기초생활수급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결혼 초기 거듭된 유산으로 말미암아 아내의 몸 상태가 정상적인 임신을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결혼 후 약 10년이 다 되어 가도록 아이가 없던 우리는 일찌감치 아이를 포기하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배가 너무 아프다고 하는 아내를 데리고 병원에 가려고 했지만, 아내의 이유를 알 수 없는 완강한 거부로 곧장 가지 못했고 3개월간의 긴 실랑이와 설득 끝에 장모님까지 대동하여 겨우겨우 선병원에 데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아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아내가 지속적으로 복용하고 있던 혈압약으로 인해 아이의 상태가 걱정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선병원에서도 아이가 장애가 있는 것이 확실하니 더 큰 병원에 가서 전문의사에게 상담을 해보라는 말과 함께 출산소견서를 써주었으니 말이다.
더 큰 병원인 충대병원에서 일주일간 입원하며 다양한 검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검사결과 다행스럽게도 태아는 이상이 없었고, 담당 의사선생님이 출산날짜가 얼마 남지 않았고 태아가 건강하니 제왕절개로 아이를 출산하는 게 어떠냐고 물었다. 정말이지 그때의 감격스러운 기쁨과 고마움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너무나도 기뻤지만, 아이가 나오는 그 순간까지도 마음을 졸였던 적은 태어나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5년이 지난 지금도 아이를 바라보며 그때의 기억을 자주 떠올리곤 한다.
이전에 나는 항상 내가 옳고 아내가 하는 일에는 옳지 않다고만 생각했다. 아이가 나온 기쁨을 만끽하고 있을 때 ‘만약 아내의 임신 사실을 초기에 알았다면 내가 과연 어떤 선택을 했을까?’라는 생각을 곰곰이 해보았다. 

병원에서는 아내가 복용하는 약이 태아에 심각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아이를 지우라고 했을 것이고, 나는 분명 병원에서 들은 말과 같이 행동하였을 것이다. 결국 내 말을 듣지 않고 병원에 가지 않았던 아내의 고집이 배 속의 아이를 지키기 위한 모성애였을지도 모르고, 또한 우리에게 큰 선물로 돌아왔기에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아내가 했던 일 중 가장 잘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렇듯 때로는 합리적인 선택보다 옳은 방향도 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나에게 양보와 배려라는 부분이 부족했다는 사실도 알려주었다. 그리고 50을 넘어 아이를 갖게 되고 그 아이가 장애를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아찔한 생각에, 나 또한 장애를 갖고 태어났으면서 장애를 갖고 있다면 아이를 포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게 부끄러울 따름이다. 또한, 과거 그러한 생각을 가지셨던 아버지와 나로 인해 지금도 정신병원에 입원 중인 어머니의 마음도 헤아릴 수 있게 되었다.

덧붙여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날 버린 아버지를 미워했던 나는 아버지의 작고를 제때 알지 못하고 사망신고를 제때 하지 않아 주민센터에 벌금을 냈던 적이 있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나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알리지 않은 가족들보다 아버지와 인연을 끊었던 나부터 반성하고 가족들을 진정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내가 더 부족했던 것 같아 늘 가슴 아픈 일로 남게 되었다.
그렇기에 앞으로는 내 가족인 아내와 아이를 돌보는 일도 내 몫이지만, 인천의 한 정신병원에서 홀로 계신 노모를 돌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는 것이 내 몫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 우리 가정의 현재와 미래
4년 전, 혼자서는 아내와 아이를 돌볼 자신이 없어 신청한 장애인활동지원서비스는 우리 가족에게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동구지회에서 파견된 활동지원사가 아내의 양육을 돕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장애등급이 2급에서 1급으로 올라갈 정도로 현재는 몸 상태가 좋지 않지만, 나는 가족들을 위해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동구아름다운복지관, 동구다기능노인복지관 등에서 제한적이고 산발적이긴 하지만 컴퓨터교육 관련 시간제 강사를 이어가고 있다. 아내 또한 최근 집에서 할 수 있는 부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어렵게 얻은 아이를 키워오며 아이에게 해주고 싶은 것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또한, 힘들겠지만 지금처럼 수급자로 살기보다는 내가 더 노력하여 수급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들처럼 삶을 살아가는 게 나의 작은 바람이다.

■우리 가정의 자랑
우리 부부의 자랑은 역시 아이라고 할 수 있겠다. 힘들게 얻기도 하였지만, 아이로 인해 크고 작은 도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달라졌고, 처갓집에서 내 위치는 결혼 전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또한, 육아를 위해 구입하였지만 고장이 잦았던 중고차로 인해 마음고생하던 우리 부부의 걱정도 아이가 해결해 주었다. 
한국장애인재단에서 진행하는 ‘드림카 프로젝트’라는 장애인차량정비사업의 대상자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유인즉 장애를 가진 부부가 아이를 키우는 데 어려움이 많을 것이라는 다수의 의견으로 말이다. 그야말로 아이는 우리 부부의 보석이다.

■주변에서 말하는 우리 가정
결혼 직후 처갓집은 말할 것 없이 친구, 직장동료 등 모두가 우리 부부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았지만, 현재는 긍정적인 시선으로 많이 바뀌게 되었다. 우선 친구들은 앞으로도 잘 하겠지만 지금처럼 웃으며 잘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말한다. 
처가의 장인, 장모님께서는 늘 건강하고 안정적으로 사는 모습에 마음이 놓인다고 말씀하신다. 또한, 동료, 친지, 동호회원 등 주변 분들께서도 항상 활발하고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에서 이제는 걱정이 사라졌다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 가족을 예쁘게 바라봐주시는 부분은 우리에게 큰 힘이 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살아가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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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진 2018-11-29 06:53:28
응원합니다
수기를읽어보니앞으로좋은일만있을것같습니다

김*주 2018-11-15 08:11:41
응원합니다.
응원합니다...
선생님이 세우신 아름다운 가정이 늘 행복하시길 기원드립니다!

이*우 2018-11-14 17:43:20
수기를 읽는 동안 중도장애로 힘들어 했던 지난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장애을 극복하시고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시고 영예의 수상까지 안으신 두분의 앞날에 마주보며 환하게 웃는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