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일푼으로 시작한 장애인 운동... 이젠 보따리 풀어 베풀어야죠
무일푼으로 시작한 장애인 운동... 이젠 보따리 풀어 베풀어야죠
  • 박지원 기자
  • 승인 2021.02.16 18: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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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한국DPI 황광식 회장, 지장협 신임 이사로 취임
장애인 운동 20년... 멕시코로 떠나 20년 만에 금의환향 “정말 악착같이 살았어요”
병원에서 운명적으로 만난 아내 “내 가치 알아봐준 사람... 잘 자라준 두 아들도 감사”
장애인 단체 과거처럼 하나된 목적, 하나된 움직임 회복해야 “서로의 존재 인정하자”
한국DPI 황광식 회장
한국DPI 황광식 회장 ⓒ소셜포커스

[소셜포커스 박지원 기자] = 한국장애인연맹(이하 한국DPI) 황광식 회장을 만났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이하 지장협) 신임 이사로 취임한 그는 특유의 수더분한 웃음으로 인터뷰 내내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했다. 1980년 여수애양병원에서 시작한 인연으로 20년 간 장애인 운동을 해왔지만, 가족들의 희생을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다짐과 함께 한국 땅을 떠난지 20년... 이 약속을 지키기위해 악착같이 살았고 보답으로 현재 자신의 자리를 찾게 됐다. 한국DPI 회장으로 금의환향하기까지 숨겨졌던 그의 애환 섞인 삶의 몇 자락을 들여다봤다. 

 

Q. 회장님 안녕하세요. 먼저 지장협 신임 이사 취임을 축하드립니다. 처음 장애 운동을 꿈꾸기 시작한 장소가 ‘병원’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때가 1980년이니까 약 40년 전이죠? 당시 여수애양병원이라고 전국에서 유명한 재활병원이 있었어요. 20대 중반의 나이에 소아마비 수술을 받으려고 서울에서 여수까지 내려갔어요. 그 병원에서 역사가 시작됐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에요. 환우들을 중심으로 많은 장애인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는데, 정말 다들 형편없는 대접을 받고 살았더라고요. 공부를 잘해도 장애인은 가고 싶은 대학, 학과를 못 가던 시절이에요. 문제는 저도 문제의식이 없었다는 거예요. 저 말고 다른 장애인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거든요. 부당한 대우를 받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많이 분노했고 인간답게 살 권리를 쟁취하고자 시작한 것이 장애 운동입니다.

여수애양병원은 외국선교사가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만든 곳이에요. 한센병은 고쳐서 음성으로 나와도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서 지역사회에서 함께 살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병원에서 사람들의 인식개선을 위해서 한센병 환자뿐만 아니라 저와 같은 소아마비 장애인, 화상 환자들도 함께 고쳐주기 시작했는데 그때를 생각하면 참 재미난 일이 많았어요. 당시 그 병원으로 모여든 환우들을 중심으로 전국장애인한가족협회가 만들어졌고, 지체부자유 대학생연합회와 합친 후에 DPI와 통합을 했죠. 이때부터 전국단위의 한국DPI 조직이 형성됐어요. 한국DPI 초창기 사진을 보면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는데 세월이 참 빠른 것 같아요.(웃음)

Q. 돈 없던 시절에 장애인 운동을 한다는 것이 참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1980년 당시에 조직체는 있었지만 정식 법인이 아닌 임의단체였기 때문에 회장으로서 모든 비용을 저의 주머니에서 해결해야했어요. 가장으로서 생계난이 극심해지니까 너무 힘들었죠. 그러다가 친한 친구의 도움으로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 기회가 생겼어요. 그게 1999년이에요. 1980년부터 거진 20년동안 장애인 운동을 했는데 이대로는 더 이상 장애인 운동을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외국에 나가서 몇 년만 돈을 모으고 평생 장애인 운동을 하겠다고 떠났는데, 경제적인 성과를 내기까지는 20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어요. 20년 만에 한국에 돌아온 후에 마침 DPI가 저를 필요로 했던 시기와 맞물려서 회장직에 도전하게 됐습니다.

한국DPI 황광식 회장 ⓒ소셜포커스

Q. 떠나신 직후에는 어떻게 생활해오신거에요?

당시 IMF였는데 멕시코에서 크게 성공한 친구가 있어서 도움을 받아서 갔어요. 처음에는 우리나라 남대문시장 같은 시장 안에 목이 좋은 가게에서 가방을 팔았어요. 가방의 ‘가’도 모르는데 장사를 배워온거죠. 1년 좀 지나서 다른 도시에서 독립을 했어요. 그때부터 제 사업을 시작하게 된거죠. 빈 손으로 가는데 타지에서 누가 반겨주겠어요. 정말 낭떠러지라는 생각으로 악착같이 했어요. 개인 사업하면서 10년 쯤 지나니까 눈덩이를 굴리면 커지듯이 점점 사업이 커졌고 의류, 모자, 가방 등을 중국에서 수입했죠. 1999년도에 한국을 떠나서 무역차 중국에 가기 위해서 한국에 들린 게 2009년이에요. 10년 만에 한국 땅을 밟게 됐죠.

다행히 멕시코는 장애인이라고 푸대접받거나 차별받는 것은 정말 못 느꼈어요. 제가 살던 곳이 멕시코였는데 멕시코는 복지국가가 아니라서 편의시설은 많이 취약해요. 그렇지만 국민성이 너무 착해요. 무엇이든지 도와주려고 해요. 어딘가 불편해서 올라가기 어렵다고 하면 3~4명이 와서 뭘 도와주면 좋겠냐고 물어봐요. 어디에서 불이익을 당해서 요구할 때도 비장애인과 동등하게 대우받는 느낌을 많이 받았죠.

Q. 회장님 활동에 사모님의 내조가 큰 도움이 됐을 것 같아요. 사모님과의 러브스토리도 궁금합니다.

아내는 저를 만나서 정말 고생을 많이 했어요. 이제는 먹고 살만 하니까 “열심히 깨끗하게 장애인 운동하라”고 응원해주는 고마운 사람이에요. 아내를 처음 만난 것도 여수애양병원이에요. 이곳에서 이루어진 역사가 많죠?(웃음) 당시에 저는 24살이었고 아내는 21살이었는데, 아내는 사촌 여동생이 화상으로 입원해서 간호차 병원에 있었어요. 당시 전국 각지의 환자들이 치료차 여수까지 왔는데 이동이 불편하니까 병원 근처 숙박업소에 머무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한 번 수술하면 2~3개월 깁스를 풀지 못하니까 저도 그때 거기 묵으면서 아내를 만났고 좋은 관계를 맺게 됐어요.

여수애양병원에서는 장애인이라고 차별받는 일이 없었어요. 비장애인 모두 함께 어울려서 지냈고 장애인에게는 천국 같은 곳이었어요. 아내도 제가 장애인이라고 거리를 두지 않았고요. 그곳에 존재했던 것은 오로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였어요. 결혼할 때는 참 난관이 많았죠. 결혼식에 처가 식구들 딱 4명이 왔어요. 장인어른도 안 오시고요. 장인어른이 나중에는 마음에 짐이 되셨는지 결혼식 비디오를 계속 돌려보시면서 우셨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처갓집에 도움도 드리고 하니 나중에는 인정해주시고 너무 잘해주셨어요. 그래서 저는 결혼 반대를 겪는 사람들을 만나면 무조건 결혼하라고 말해줘요.(웃음) 대신 네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드려야한다고 충고하죠. 무엇보다 모든 난관 헤치고 사랑으로 버텨준 아내에게 감사해요.

Q. 자식 농사를 잘 지으셨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특별한 교육관이 있으신가요?

사실 장애인 운동한다고 처자식을 너무 돌보지 않아서 많이 힘들었어요. 막내 아들이 4살 때였는데 구멍가게에서 브라보콘을 파는거에요. 당시에 아마 300원정도 했을거에요. 아들이 먹고 싶다고 하는데 제가 돈이 없으니까 내려놓으라고 하는데 아들이 놓지 않고 떼를 쓰는 거예요. 그날 아들도 울고 저도 울었어요. 다시 돈을 벌어서 이 일을 하지 않는 이상 더 이상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울다시피 떠났어요. 지금은 웃으면서 돌아왔지만요.

멕시코로 떠날 때만 해도 큰 아들이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이었는데 고등학교만 해외에서 다니고 한양대학교를 졸업하고 지금은 공인회계사로 일하고 있어요. 작은 아들은 UC버클리대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대기업에서 근무해요. 특별한 교육관은 없어요.(웃음) 다만 과외를 시키고 그럴 형편은 안 됐어도 공부는 할 수 있을 때 해야한다는 생각에 학교 문제는 신경을 많이 썼어요. 아버지가 장애인이니까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장애인을 보면 무엇이든 도와주려고 하고, 또래보다 더 성숙한 면도 있었던 것 같아요.

Q. 장애인 단체를 위해서 사비로 공장도 운영하신다고 들었어요.

어느 조직이든 항상 재정이 문제잖아요. DPI 조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고자 작년 9월 경기도 화성에 장애인 보조공학 관련 회사를 창업했어요. 장애인 차량 편의시설을 제조하는 데 핸드컨트롤이나 오른발, 왼발 악셀레이터를 옮기거나, 차량에 휠체어를 탑재하는 것, 장애인 리프트 장치를 설치하는 등의 일을 해요. 장애인에게 도움도 되고 사업적 측면에서 이익이 될 수 있도록 시작했는데 두 가지 다 잘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웃음) 경제적인 수익이 나려면 몇 년은 걸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수익금은 100% DPI 재정을 위해 사용될 예정이에요. 저는 그간 사업을 하면서 재정적으로 많이 안정됐으니 이제는 베풀면서 장애계에 일조하고 싶어요.

한국DPI 황광식 회장 ⓒ소셜포커스

Q. 우리나라 장애계를 바라보는 회장님의 시각이 궁금합니다.

과거 장애인 운동은 생활권을 위한 투쟁 중심이었어요. 지체, 농아, 맹인 등 장애 유형에 상관없이 단체들이 같은 목적을 가지고 하나가 되어서 투쟁을 했어요. 지금은 각자 속해있는 단체의 이익만을 위해서 지엽적으로 장애인 복지를 주장하는데 저로서는 사실 이상해보여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할 수 있을지라도 외부에서 보면 아주 작은 일에 불과하거든요. 이제 다시 전 장애계가 하나되어서 전체 장애인들의 요구를 외치고 실현될 때까지 투쟁해야한다고 생각해요.

물론 보수적인 장애인 단체도 있고 급진적인 투쟁 단체들도 있어요. 저는 두 존재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확실한 건 점잖게 “주세요”한다고 절대 주지 않는다는 거죠. 역사상 노동운동, 민주화운동, 빈민운동만 봐도 모두 투쟁을 통해서 권리를 쟁취해냈거든요. 투쟁이 전부인양해서도 안되고 잠자코 있어서도 안 되고요. 같은 목적을 가지고 서로 활동해가면 이런 간극들이 좁혀지지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지난해 배출된 4명의 장애인 국회의원들도 임기에 연연하지 말고 장애인들의 삶을 위해 역사에 남을 헌신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Q. 임기동안에 주력하신 한국DPI 활동이 있다면요?

임기동안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은 DPI가 전세계 장애인 단체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는 것과 2006년 12월 유엔에서 채택된 세계장애인권리협약(UN CRPD)을 잘 이행하도록 UN CRPD연대의 간사 단체로서 활발하게 활동하는 것이예요. 지난해 코로나로 국내외 모든 활동과 행사가 중지된 상황에서도 한국DPI는 많은 국가들과 화상회의를 진행하고 국제 컨퍼런스를 개최하고 실질적인 성과를 거뒀습니다. 2021년에도 다양한 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니 많은 참여 부탁드려요.

Q. 고정 질문인데요, 삶의 영향을 끼친 신념이나 사건이 있다면요?

“심은대로 거두리라”는 문구를 좋아해요. 젊었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장애인 복지를 위해 운동했을 때는 아무도 안 알아줬는데 20년 뒤에 이렇게 동료, 선후배들이 기억해주고 알아주니 감사해요. 황광식하면 ‘초창기 장애인 운동을 했던 사람’ 이렇게 제가 뿌려놓았던 것들이 있으니 거두는 게 아닌가 싶어요. DPI 회장이 된 것은 정말 큰 사건이에요. DPI가 작은 장애인 단체가 아니라 국제 단체인데 회장직을 맡을 수 있게 된 것도 이런 밑거름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Q. 이번에 지장협 신임 이사로 취임하셨는데, 지장협에 기대하시는 바가 있나요?

과거 지장협 초대 장기철 회장님과의 인연도 있었고, 현 김광환 회장님도 당시 일선에서 최선을 다해 장애인 운동에 임하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국내 최대 규모의 장애인 단체로서 지장협이 해야할 역할이 반드시 있다고 봐요. 조직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단체가 아닌 15개 장애유형을 총망라한 국내 전체의 장애인 복지를 위해 힘을 기울일 때라고 생각해요. 이에 보탬이 되고자 저 또한 이사로서 노력할 것이고, 장애인 복지와 관련된 일은 궂은 일도 마다하지 않고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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