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랑생가와 시문학파 그리고 모란공원
영랑생가와 시문학파 그리고 모란공원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2.08.10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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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등의 ‘시문학’지는 한국 현대시 탯줄
전국서 찾는 영랑생가, 휠체어 출입불가 유감

휠체어 명소 탐방기

모란이 활짝 핀 영랑생가 안채. ⓒ강진군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같이
풀 아래 웃음 짓는 샘물같이
내 마음 고요히 고운 봄 길 위에
오늘 하루 하늘을 우러르고 싶다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로 알려진 위 시는 김영랑 선생이 1930년 시문학 2호에 ‘내 마음 고요히 고흔 봄길 우에’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시의 2연 중 1연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자주 등장하는 작품이다. 김영랑은 국민애송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우리에게 너무 잘 알려져 있다. 영랑은 호이고, 본명은 김윤식이다. 그는 1903년에 전남 강진에서 태어났다. 1903년은 고종황제 시절이다. 완전히 한자세대라는 것이다. 현대문학이 형체를 갖추기도 전이다.

그런데도 김영랑이 초기에 발표한 위 시에는 한자어나 외래어가 한마디도 없다. 순순한 우리말만으로도 풍부한 서정미를 너무나 잘 보여주고 있다. 김영랑은 시로서 우리말의 아름다움과 남도 사투리의 정겨움을 담아냈다. 우리말을 아름답게 가꾸는데 강한 신념이 없이는 쉽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현대시는 1920년대에 와서야 싹이 트기 시작했다. 1919년 한국 최초의 자유시 ‘불노리’를 발표한 주요한, 김소월의 탄생에 큰 영향을 준 김억 등이 그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주요한과 김억은 후일 친일 반민족행위를 함으로써 현대시 개척자로서 의미는 퇴색했다.

한국의 현대시가 순수한 서정미를 바탕으로 제 모습을 제대로 갖추게 된 것은 1930년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 등이 주축이 된 시문학파의 탄생이 아닐까 싶다. 물론 1920년대에도 정지용, 김소월, 한용운, 이상화 등이 시집을 내고 좋은 시를 발표하면서 한국 현대시는 그 틀을 갖추기 시작했다. 

‘시문학파’란 1930년대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이 함께 발간한 ‘시문학’이라는 문예지를 통해서 활동했던 시인들을 말한다. 이들은 이념에 휩쓸리지 않고 이 땅에 순수문학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세사람 외에도 정인보, 이하윤, 변영로, 김현구, 신석정, 허보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 시문학파 멤버들은 심화된 감정을 한국적인 운율로 재구성하는 자각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자각과 의식은 현대시의 본질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영랑은 이 후 '문학', '문장', '조광(朝光),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과 잡지에 80여편의 시와 역시(譯詩) 및 수필 등을 발표하였다. 

김영랑이 타계하기 전 해에 직접 펴낸 ‘영랑시선’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오-매 단풍 들것네’, ‘바다로 가자’, ‘두견(杜鵑)’ 등의 60여 편에 달하는 시가 들어있다. 북도의 김소월과 더불어 남도의 김영랑은 한국 서정시 역사를 통틀어 최고의 시인으로 손꼽힌다.

세계모란공원에 있는 김영랑의 동상(좌)과 시문학파기념관 뜰에 있는 김영랑, 정지용, 박용철의 3인상. ⓒ소셜포커스
시문학 창간호와 관련 시인들 모습을 담은 조형물. ⓒ소셜포커스
강진 영랑생가의 모습. ⓒ강진군

김영랑은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다. 휘문의숙 3학년에 재학 중이던 1919년 3.1 운동이 일어났다. 이에 독립선언서를 품에 안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와서 강진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되는 바람에 구속되어 갖은 곤욕을 겪기도 하였다. 또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끝내 거부한 몇 안 되는 절개곧은 지식인이었다.

그리고 해방 후에는 정부에서 출판국장을 맡는 등 새나라의 문화적 기틀을 다지는데도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6·25전쟁 때 서울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남아 있다가 9·28수복으로 인민군이 패퇴하면서 난사했던 총탄을 대문 앞에서 맞고 47세의 나이로 아까운 생을 마감했다.

김영랑의 출생지인 전남 강진의 강진군청 뒤에는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이 있다.

생가에는 본채, 사랑채, 문간채, 장독대, 우물 등이 남아 있다. 위쪽은 대숲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으며, 앞쪽 돌담은 담쟁이넝쿨이 옷을 입고 있다. 집안에는 은행나무, 동백나무, 꽝꽝나무와 함께 모란이 화려하게 피어난다.

생가 주변에는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과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시비가 세워졌고, 생가는 국가지정문화재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됐다.

영랑생가와 골목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시문학파기념관이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시문학파에 대한 자료는 물론, 한국 현대시의 발자취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자료가 잘 전시되어 있다. 기념관에선 우리 현대문학의 태동기에 큰 족적을 남긴 이들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전시관에선 1920년대에 발간되었던 한용운의 "님의침묵"이나 김소월의 "진달래꽃" 등 희귀본 시집도 볼 수 있다.

또 강진군은 영랑생가와 인접한 뒷산에 세계모란공원을 건설하여 2017년 개장하였다.

사계절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유리온실과 세계 각국의 모란을 감상할 수 있는 시설, 영랑선생 추모원, 생태연못, 전망대 등을 갖추고 있다. 특히 야간에는 경관조명을 통해 대나무 숲을 그윽하게 밝히고, 모란 폭포 및 다양한 조형물과 함께 매력을 뽐낸다. 또 모란을 소재로한 외국의 유명한 시들도 함께 감상해볼 수 있다.

영랑생가는 이렇듯 강진군청에서 100여 미터 거리에 불과한 읍내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고, 시문학파기념관 및 세계모란공원이 감싸고 있어서 강진을 방문하는 여행객이라면 가장 먼저 찾는 강진군 최고의 관광명소라 할 수 있다. 특히 모란꽃이 필 5월이 되면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영랑생가를 찾아온다.

강진 영랑생가 옆에 있는 시문학파기념관. ⓒ소셜포커스
시문학파 기념관의 전시자료. ⓒ소셜포커스
세계모란공원의 풍경. ⓒ소셜포커스
사계절 모란을 볼 수 있는 유리온실. ⓒ소셜포커스

영랑생가는 누구나 방문할 수 있는 곳이라야 한다. 그러나 휠체어를 이용하는 장애인 등 이동약자는 출입금지구역이다. 유일한 출입구인 문간채에 있는 문턱 때문이다.

영랑생가는 강진군이 운영하는 관광시설이자 공공시설이고 공중시설이다. 그렇다면 장애인이건 비장애인이건 차별없는 이용이 보장되어야 한다.

누구에게나 평등한 이용이 보장돼야 할 공공시설에서 편의시설 미비로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똑같은 수준의 이용이 불가능하다면 이는 법령에서 금지하는 장애인 차별에 해당한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이하 ‘장차법’) 제4조에는 장애인에게 정당한 편의 제공을 거부하는 경우에도 장애인 차별행위로 규정하고 있다. 또, ‘정당한 편의’란 장애인이 장애가 없는 사람과 동등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편의시설 설치 등 제반 조치를 말한다고 돼 있다.

또 장차법 제24조(문화ㆍ예술활동의 차별금지)와 제24조의2(관광활동의 차별금지)의 각 규정에 의하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장애인이 문화·예술 및 관광활동을 하는데 차별을 해서는 안되며, 정당한 편의를 제공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강진군청은 장애인 차별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동안 강진군청 관계자들은 문화재 시설이라서 어쩔 수 없다는 답변만 반복했다. 몇 년 전에도 그랬고 최근에도 그랬다. 수십년이 지나도록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고궁 등 많은 문화재 시설이 출입문에는 문턱이 있지만 경사로를 덧붙여 이동약자의 편의를 지원하고 있다.

원형문화재의 경우도 이동약자 편의시설은 갖추고 있다. 그러나 문턱이 있는 영랑생가 문간채는 철거되고 없던 것은 1993년에 복원한 것이다. 더구나 복원시설이라면 복원공사를 할 때 이동약자 편의시설을 충분히 고려했어야 했다.

문화재에 장애인 편의시설을 설치한다고 해서 문화재가 훼손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다면 문화재의 가치는 오히려 높아질 것이다. 문화재청에서도 최근에 강진군청에 대하여 영랑생가에 대하여 장애인 편의시설 갖추도록 권고하는 공문까지 보냈다고 한다.

강진군청이 먼저 문화재청과 협의를 하여 장애인 편의시설을 갖추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라는 핑계만 반복하더니 오히려 문화재청에서 먼저 시설을 개선하라고 했다니 지자체 공무원들의 의식을 짐작할만하다.

다행히 최근에 통화를 했던 강진군청 문화예술팀장은 문화재청 제안도 있고 하여 예산이 마련 되는대로 적절한 방법으로 이동약자 편의시설을 갖추겠다고 하였다.

영랑생가와 그 주변 관광시설에서 이동약자가 불편으로 인한 차별을 받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강진군청에서 영랑생가와 시문학파기념관으로 이동하는 도로의 노면은 온통 페빙스톤을 깔아 놓는 바람에 요철이 심하여 휠체어나 유아차 등의 통행에 큰 불편을 준다. 내가 불편해서 그런지 주변 시설과 어울리는 것 같지도 않고 아름답게 보이지도 않는다.

골목길이 원래부터 요철구조는 아니었을 것이다. 생가는 옛 모습이 훼손될까 봐 손도 못 댄다면서 골목길은 예외일까? 누구의 아이디언지 예산을 들여서 꾸민 것인데, 이동약자들에겐 치명적인 불편시설일 뿐만 아니라 하이힐을 신은 여성들이 이런 길을 걷다가 넘어져서 발목을 삐기도 한다. 공원이나 관광지 등에서 가장 먼저 퇴출되어야 할 공법이다.

영랑생가 뒤편이 있는 세계모란공원 역시도 휠체어가 통행할 수 없어 개선해야 할 부분이 자주 눈에 띈다. 시급히 개선해야 할 것이다. 장애인 편의시설에 대한 강진군청 직원들의 인식이 문제다. 본지는 과거 강진군이 자랑하는 관광명소들을 소개하면서 이동약자 불편시설을 지속적으로 제기하였다. 그러나 좀처럼 달라지지 않고 있다. 장애인 편의시설 문제는 장애인 관련 공무원만 숙지해서 될 일이 아니다. 공공시설을 발주하고 관리하는 모든 공무원이 숙지해야 할 일이다. 지속적인 교육만이 이를 뒷받침할 수 있다.

영랑생가 유일한 출입문인 문간채 대문의 문턱과 계단. ⓒ소셜포커스
영랑생가 가는길과 주변은 온통 요철블럭으로 깔려 있어 이동약자의 통행에는 최악이다. ⓒ소셜포커스
세계모란공원 주변 시설들이 휠체어 장애인 등이 이용하기엔 불편하게 설계돼 있다.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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