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한용운 선생… '님의 생가'를 찾아서
민족대표 한용운 선생… '님의 생가'를 찾아서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2.02.25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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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 한용운 생가지, 만해사·만해문학체험관·민족시비공원 등 추모시설 많아
독립선언서 완성하고 3.1운동 주도한 항일운동가, 천재문학가, 종교개혁가
민족 최고의 애송시 “님의 침묵” 남기고, 시·소설 등 현대문학의 1세대 개척자
생가 주변 시비공원 등 일부시설, 이동약자 접근성도 개선되었으면...
충남 홍성군 만해 한용운 생가지의 풍경 ⓒ소셜포커스

휠체어 명소 탐방기 - 충남 홍성 한용운 생가지

충남 홍성에는 김좌진 장군의 생가와 한용운 선생의 생가가 기념관과 함께 잘 꾸며져 있다. 김좌진 장군과 한용운 선생은 역사 인물이 많은 홍성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아닌가? 필자는 얼마 전 홍성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지를 다녀왔다.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의 생가지에는 한용운 선생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던 생가의 모습과 만해사(사당), 만해문학체험관, 민족시비공원 등이 조성되어 있다. 만해의 성장과정 및 문학세계와 항일 독립운동의 흔적을 관찰하고 추모하면서 애국애족의 정신을 기를 수 있는 호국의 명소이다.

한용운 선생의 많은 업적 중에서 가장 첫째를 꼽으라면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독립운동이 아닐까 싶다. 마침 삼일절이 다가오고 있어 한용운 선생의 생가지를 둘러보는 동안 선생의 업적에 대한 감흥이 더욱 강하게 다가왔다.

일제 강점기였던 1919년, 우리 민족은 일제에 저항하여 불꽃처럼 일어나서 세계만방에 그 위엄을 드러냈다. 그 불씨를 마련하기 위해 한용운 선생을 비롯한 민족대표 33인이 뜻을 같이 했다.

3월 1일을 기하여 민족대표들은 종로구 인사동의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발표하였고, 탑골공원에 모인 학생과 군중들이 만세시위를 하면서 3.1운동은 서막이 올랐다.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에 고하는 선언식은 서울뿐만 아니라 지방의 주요 도시에서도 열렸다. 날이 갈수록 파급력이 더욱 커졌고 한달 이상 계속되면서 중소도시를 거쳐 농촌까지 퍼져나갔다. 해외교민들에게도 이어졌다.

3.1운동에 참여한 사람은 200만명이 넘었으며,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7,50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4만명 이상이 투옥되었다.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천만명 정도에 불과했고 성인 비율이 지금보다 훨씬 낮았던 시절이니 참여자와 희생자의 규모는 실로 엄청났던 것이었다

이렇게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갔던 배경은 지도부의 철저한 사전준비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립선언서가 미리 작성되고, 수만부가 제작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 고종의 장례식을 며칠 앞두고 D-day를 잡은 것도 보다 많은 사람들의 참여를 위한 고도의 전략이 아니었나 싶다.

민족대표들은 원래 탑골공원에 모두 모여 행사를 하기로 하였으나 하루 전에 장소를 태화관이라는 음식점으로 변경했다. 전해오는 기록에 의하면 행사장에서 지도자들이 연행될 경우 성난 군중들로 인한 폭력사태를 우려하여 장소를 바꾸었다고 한다. 전략상 장소를 분산한 것은 아니었을까?

삼일운동 당시의 생생한 현장이 담긴 탑골공원의 부조화 ⓒ소셜포커스

그런데 어느 유명한 역사 강사가 이 과정을 강의하면서 “학생들은 탑골공원에서 고생하고 있는데,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대표자가 사귀는 사람이 마담으로 있는(이 부분도 사실과 다름) 룸싸롱에 모여 술판을 즐겼다”는 식으로 폄훼하는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그 강사는 유족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기도 했으며, 사회적으로 많은 파문을 던졌다. 워낙 이름이 크게 알려진 강사의 영향력인지 그 이후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런 인식이 확산된 면도 있었던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지도자들이 음식점에 모여서 행사를 했다는 이유만으로 치밀한 사전 준비로 동지들을 모으고, 일제의 눈을 피해 선언서 수만장을 미리 인쇄해서 전국에 배포하는 등 이면에 가려진 엄청난 노력과 업적이 스타강사 한 사람의 재미삼아 튀는 행위로 먹칠이 되어버린 것이다.

민족대표들은 행사를 하고 나서 스스로 경찰서에 연락하여 연행되어갔다. 그리고 모진 고문과 수년간의 옥살이로 심신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

불교계의 대표로 참여한 한용운 선생은 민족대표들 중에서도 핵심적인 위치에 있었다. 태화관에서 대표연설을 했을 뿐만 아니라, 독립선언서 초안의 말미에 전체를 집약하는 행동강령인 공약삼장을 추가함으로써 선언서를 완성했다. 일제가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도 이 공약삼장에 가장 큰 비중을 두었다.

독립선언서 초안자는 최남선이었다. 그러나 그는 거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학자로 남고 싶어서” 라는 해괴한 변명을 남기고 민족대표 명단에서 스스로 빠져버렸다. 나중에는 일제의 앞잡이로 변절하여 지탄을 받았으므로 독립선언에서 최남선의 역할은 이미 의미를 잃었다.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이름을 올렸던 33인은 세월이 흐르면서 각자의 길이 달라졌다. 다수의 인사들은 3.1운동 후에도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몇 사람은 일제의 압력과 회유에 무너지고 변절하여 일제의 앞잡이가 되기도 했다. 또 일부는 그저 이렇다 할 존재감이 없이 은둔해버리기도 했다.

한용운 선생은 세상을 하직하는 날까지 민족혼을 지키고 일제 항거했다. 최후의 민족대표이자 최고의 민족대표였다. 그러나 선생은 1944년 6월 29일, 불과 1년 후에 있을 광복을 보지 못하고 애석하게도 그 위대한 생을 마감했다.

한용운 선생의 일대기가 전시된 만해문학체험관 ⓒ소셜포커스
한용운 선생의 초상화와 유물들이 전시된 모습 ⓒ소셜포커스

우리는 선생을 “독립운동가이자 시인이고 승려였다” 말한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는 선생이 살오면서 우리 민족에게 남긴 업적을 모두 담아내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선생은 최고의 민족대표이자 천재문학가이고, 종교개혁가이자 사상가였다.

선생이 청춘을 보내던 시절 한글은 아직 국문으로서 제자리를 잡지도 못했고, 현대문학의 기반이 정립되기도 전이었다. 그러나 선생은 아름다운 우리말로 현대적 개념의 자유시를 쓰고 시집을 냈으며, 잡지를 발간하고 현대식 소설을 썼다. 천재적인 자질로 현대문학을 개척하고 창조해 나간 선구자였다. 명쾌한 논설과 웅변으로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하고 우리 민족에게 감동을 주었다.

선생에게 시인의 이미지가 강하게 남은 것은 ‘님의침묵’, ‘알수없어요’, ‘나룻배와행인’ 등 워낙 이름난 시를 많이 남겼기 때문일 것이다. ‘님의침묵’은 선생이 최초로 펴낸 시집의 이름이기도 하다. 만해의 이 시집은 오늘날 많은 나라에서 번역되어 세계인들이 애송하고 있다.

선생은 ‘흑풍’, ‘박명’, ‘후회’ 등 여러 편의 장편소설과 단편소설을 남기기도 하였다. 특히 1939년부터 “삼국지”를 번역하여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연재를 한 적이 있다. 이는 국내 최초의 한글로 쓰여진 ‘삼국지’가 아니었을까 싶다.

선생은 18세(1896년)에 홀연히 집을 나서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1905년에 백담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그리고 당시 모순과 부패가 만연하던 한국불교의 상황을 개탄하면서 개혁방안을 제시했다. 실천적 지침서인 ‘조선불교유신론’을 발간함으로써 불교계에 일대 혁신운동을 일으켰다. 친일승려들의 친일매불(親日賣佛) 행위를 규탄하고 송광사에서 승려궐기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또 방대한 대장경을 독파하고 알기 쉽게 번역한 ‘불교대전’을 간행하였고, 불교 잡지 ‘유심(惟心)’을 발간하였다. 불교의 대중화는 물론 숨막히는 일제하에서 민족을 일깨웠다.

만해문학체험관의 건물 ⓒ소셜포커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생가 ⓒ소셜포커스
만해 한용운 선생의 사당 ⓒ소셜포커스

 

홍성군의 만해 생가지에 이르면 먼저 만해문학체험관 건물을 만나게 된다. 2007년에 건립되었고 만해의 일대기에 관한 자료와 그가 남긴 시집을 비롯하여 많은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문학체험관 건물을 나오면 우측으로 100m 거리에 아담한 초가 한 채가 보인다. 선생의 생가 건물이다. 생가로 가는 길 중간중간에 공약삼장비와 시비, 어록비, 동상 등에서 만해의 사상이 풍겨난다.

생가는 낮은 야산을 등진 양지바른 곳에 자리잡고 있다. 1992년 본래의 생가터에 생가를 복원하고 충남도 기념물로 지정했다.

가옥은 양면 3칸 측면 2칸 규모인데 양옆으로 반칸씩 달아내어 헛간 등 다목적 공간을 만들었다. 그 양쪽 공간의 벽체가 집 전체를 감싸는 것 같아 한층 따뜻해 보인다. 싸리나무로 울타리를 둘렀으며 마당 한쪽에는 우물이 있다. 옛적 고향의 정취가 물씬 풍겨난다. 안방문 위에 선생의 필적으로 쓰인 현판에서도 선생의 위대한 사상의 한 단편을 엿볼 수 있다.

상가를 나와 우측을 처다보면 계단 위로 태극 문양의 큰 대문 기와집이 내려다 보고 있다. 그 대문을 들어가면 선생의 혼백을 모신 사당이다.

휠체어를 탄 필자도 그 사당에 올라가 위인의 업적에 경배를 올리고 싶었지만 휠체어가 접근할 길은 없다. 휠체어를 탄 장애인은 위인을 추모하는데도 차별을 받은 것 같이 마음이 편치 않았다. 생가에서 사당까지 고도차가 있기는 하지만 마음만 먹은면 길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서울 효창공원에 마련된 안중근, 윤봉길, 이봉창 등 호국열사 묘지는 지형의 고도차가 훨씬 높지만 측면으로 길게 완만한 경사형 산책로가 꾸며져 휠체어나 유아차의 접근이 쉽게 되어 있다. 공무원들의 인식전환만 있으면 충분한 일이다.

생가 건물을 중심으로 만해사의 반대쪽에는 넓은 잔디광장이 펼쳐지며, 광장을 가로질러 생가 뒤쪽의 나지막한 야산으로 향하면 민족시비공원이다.

이곳에는 한용운 선생의 ‘복종’, 정지용의 ‘고향’, 이육사의 ‘절정’, 윤동주의 ‘간’ 등 광복 전후 활동한 민족시인 20인의 주옥같은 시와 어록을 새긴 시비를 세웠다.

이 시비공원 역시 휠체어를 타거나 유아차를 동반한 사람은 접근이 불가능한 인간차별 구역이다. 이곳 역시 조금만 마음을 바꾸면 무장애 공간으로 바꾸고 지금보다 훨씬 아름다운 보행공간을 꾸밀수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진하게 남는다. 시비의 사이사이를 잇는 산책로를 완만한 경사로의 무장애 공간으로 꾸미면 보행공간도 휠씬 많아질 것이다.

공원과 같은 힐링시설은 보행공간이 많을수록 우수한 시설로 평가를 받는다. 장애인에게 편리한 시설은 비장애인에게는 더욱 편리한 시설이 된다. 홍성군은 한용운 생가지 일대에 대한 정비사업을 추진할 것이라고 하는데 그때는 제발 무장애 개념이 도입되었으면 좋겠다.

생가지의 조형물들 ⓒ소셜포커스

 

민족시비 공원으로 오르는 길, 진입로의 계단을 완만한 경사구조로 개선해야 한다.  ⓒ소셜포커스
민족시비공원에 조성된 시비들 ⓒ소셜포커스
휠체어 및 유아차 등의 통행이 불가능한 시비공원의 산책길 ⓒ소셜포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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