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의 성지, 진주성① -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호국의 성지, 진주성① - 임진대첩과 계사순의
  • 조봉현 논설위원
  • 승인 2022.03.21 08: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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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민 목사와 백성들이 5배 넘는 왜군을 격퇴한 진주대첩의 현장
2차 전투에선 9만의 왜군 상대로 6천 병력과 7만 백성 모두 순절
수려한 조경과 어울린 촉석루, 성곽, 순의단 등 유적과 추모시설

휠체어 명소 탐방기 : 호국의 성지, 진주성①

진주성과 촉석루
진주성과 촉석루, 절벽아래 끝부분에 의암바위가 보인다. ⓒ소셜포커스

경남 진주시에 소재한 진주성은 임진왜란 때 한산도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3대첩의 하나인 진주대첩을 기록했던 호국의 성지다. 

진주성은 문화체육관광부·한국관광공사 주관 ‘한국관광 100선’에 4회 연속(2013~2020) 선정되었다. 그리고 국내 3대 누각의 하나인 진주성의 촉석루는 미국 ‘CNN GO’에서 2012년도에 선정한 ‘한국관광지 BEST 50‘에 포함되었던 관광명소이기도 하다.

진주성 안에는 국립진주박물관이 있다. 국내 유일의 임진왜란 전문 박물관이다.

수려한 조경과 함께 보고 즐기고 배울 것이 많은 경남의 명소, 휠체어를 타고 진주성을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은 2번에 걸친 대혈전을 겪었다. 한번은 1592년 10월에 있었던 제1차 전투이고, 또 한번은 그다음 해인 1593년 7월에 있었던 제2차 전투다.

1592년(임진년) 일본은 16만의 대병력으로 조선을 침략하였다. 무방비 상태의 조선은 전쟁이 시작된 지 불과 20일 만에 수도인 한양까지 내줄 정도로 패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진주성에서는 압도적인 전력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김시민 장군을 중심으로 한 군관민이 똘똘 뭉쳤다. 그리고 철저한 사전 준비와 치밀한 전략으로 왜군들을 물리치는데 성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 김시민 장군은 진주목사가 아니었다. 왜군들이 파죽지세로 몰려오자 진주목사 이경은 성을 비우고 지리산으로 피하여 은신하던 중 사망했다. 할 수 없이 목사를 보좌했던 판관 김시민이 목사직을 대신했다. 그리고 진주목 관하 여러 고을에서 왜군을 격퇴시킨 공로로 정식 진주목사에 제수되었다. 무관으로서 목사가 된 김시민 장군은 진주성 방어를 위해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화약과 무기를 비축하는 등 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곡창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전라도 쪽으로 진군하던 왜군들은 10월 8일 2만의 병력으로 진주성을 공격해 왔다. 이에 비해 김시민은 3,800여 명의 군사와 백성으로 맞서야 했다. 성안의 모든 사람들은 있는 힘을 다해 싸웠고, 성 밖에서는 곽재우 등 의병부대가 왜군들의 배후를 위협했다. 7일 동안의 치열한 전투 끝에 일본군은 수많은 사상자를 남기고 결국 물러났다. 김시민과 진주성의 백성들은 5배가 넘는 왜군들을 물리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김시민은 왜군이 물러가면서 쏜 조총에 맞아 며칠동안 사경을 헤매다가 38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군관들은 김시민의 유언에 따라 왜군들의 역공을 우려하여 사망 사실을 한동안 비밀로 했다.

조정에서는 김시민의 여러 공로를 인정하여 경상우병사로 임명했다. 그러나 임명장이 진주에 도착했을 때 이미 숨을 거두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인가? 그 후 조정에서는 김시민 장군에게 이순신 장군과 같은 이름의 ’충무공‘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
임진왜란 전문박물관인 국립진주박물관 ⓒ소셜포커스

 

진주성 성곽의 모습 ⓒ소셜포커스
김시민 장군의 동상 ⓒ소셜포커스

진주성의 두 번째 대전투는 그다음 해 1593년 7월에 벌어졌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회담이 시작되고 전쟁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자 보급이 어려워진 왜군들은 경상도 남부지역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강화협상을 주도할 목적인지 새로운 무력시위를 벌이기로 한다. 1차 전투에서 대패를 당했던 진주성에 대하여 전군을 동원한 보복전을 지시한 것이다.

진주성은 1차전 대승 이후 안전지대로 여긴 수만명의 백성들이 몰려와 있었다. 그러나 병력은 관군과 의병을 합해도 6천을 넘지 못했다.

이에 비해 왜군들은 남부에 내려와 있던 모든 병력을 동원했다. 무려 9만이나 되었다. 그것도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 등 핵심전력의 정예부대였다. 왜군의 전력은 진주성 병력의 15배가 넘어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었다.

왜장 고니시는 조선이 무모한 대응을 포기하고 진주성을 비워주면 일시 점령했다가 물러갈 것이라고 강화상대인 명나라 심유경에게 충고했다. 명군에서도 수성을 포기하라고 권했다. 원군으로 와서 조선을 도와주기는커녕 자국의 잇속만 챙기는 명군을 믿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진주성에 주둔하고 있던 창의사(의병장)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은 끝까지 싸우기로 맹세하고 성문을 굳게 닫고 있었다. 실록에서는 김천일, 최경회, 황진을 삼장사(三壯士)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도단위에 병마절도사(보통 ‘병사’라는 약칭을 사용)라는 종2품에 해당하는 군사령관을 두었다. 면적이 큰 경상도는 좌우로 나누어 2명의 병사를 두었고, 충청도에는 1명의 병사가 있었다. 진주와 같이 도 아래에서 가장 큰 고을인 목을 다스리는 목사는 정3품이었다.

최경회는 본래 무관이 아니었으나 왜란이 일어나자 나주에서 먼저 의병을 일으킨 김천일의 격문을 받고 화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금산전투 등 여러 곳에서 왜적을 격퇴한 공로를 인정받아 경상우병사에 임명된 것이다.

진주에는 경상우병사의 진영이 있었으며, 충청병사도 지원병을 이끌고 왔다. 의병을 이끌고 온 김천일은 연합군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었다. 병마절도사로서 군권을 가진 최병회가 의병선배(?)인 김천일에게 지휘권을 양보한 것으로 보인다. 김천일 역시 호남의 대표적 유학자이자 의병장으로서 전국을 누비며 왜적을 무찌른 경험이 많았으며, 창의사라는 임시벼슬을 받은 상태다.

7월 20일에 왜군의 진주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성안에서는 관군과 의병, 주민들이 합세하여 처절하게 대항하였다. 전투가 7일간 계속되면서 여러 차례 왜군들을 격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폭우로 한쪽 성벽이 무너지고 그곳으로 왜군들이 난입하면서 안그래도 중과부적인 전세는 급격히 기울어졌다. 그리고 결국은 군관민이 모두 장렬하게 순절하면서 전투는 끝이 났다. 남아 있던 백성들도 왜군들의 무자비한 분풀이 살육에 희생되었다.

역사에서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한 조선의 군사와 백성들이 7만명에 달했다고 전한다. 진주성 안에는 당시에 순절한 그들의 충혼을 기리는 추모시설이 마련되어 있다. “임진대첩계사순의단”이다. 임진년(1592년)의 대첩과 계사년(1593)에 순절한 의로운 넋을 기리는 제단이다.

진주서의 공북문(북문)과 촉석문(동문)
진주서의 공북문(북문)과 촉석문(동문) ⓒ소셜포커스
진주성도(진주박물관 소장) ⓒ소셜포커스
임진왜란 때 사용된 조선의 무기들(진주박물관 전시물)  ⓒ소셜포커스
임진대첩계사순의단 ⓒ소셜포커스

 

진주성은 의기(의로운 기생) 논개의 충절로도 유명하다. 진주성을 점령한 왜군들은 촉석루에서 그들의 전승 잔치가 있었다. 여기에 동원된 기생 논개는 촉석루 아래 바위에서 왜장 에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으로 투신하여 그를 물귀신으로 만들어 버렸다. 사람들은 논개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그 바위를 의암이라고 하였고, 촉석루 바로 옆에 의기사라는 사당을 지었다.

논개는 왜장을 껴안은 손깍지가 물속에서 풀리는 것을 막기 위해 열 손가락에 가락지를 끼었다고 한다. 의기사를 지키는 논개의 초상화엔 열 손가락에 모두 가락지를 낀 모습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전쟁을 승패로 구분 짓기를 좋아하는 어떤 사람들은 2차 진주성 전투를 두고 패전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규병력 15:1이라는 비교 불가한 전력으로 죽음을 예상하면서 조국을 지키기 위해 군관민 모두가 장렬한 최후를 마친 그 성전을 어찌 패전이라는 단순 논리로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굳이 승패로 나누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발상이다.

진주성은 우리가 영원히 지키고 가꾸어야 할 호국의 성지다. 진주성에는 촉석루를 비롯하여 임진왜란 때 나라를 지키다가 순국한 선열들의 많은 유적과 추념시설들이 살아있는 곳이다.

진주성은 원래 내성과 외성이 있었다. 조선시대 진주성은 외성을 포함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내성만 남아 있으며, 진주시는 외성 발굴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다음 편에서는 진주성 내의 각종 시설과 장애인 접근성 등을 소개할 예정이다.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의기사
논개의 충절을 기리는 의기사 ⓒ소셜포커스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호국사의 풍경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승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한 호국사의 풍경 ⓒ소셜포커스
촉석루의 4계절(사진=진주시 홈페이지)
촉석루의 4계절(사진=진주시 홈페이지 진주관광 싸이트)

* 위 글의 내용 중 사실관계는 네이버지식백과에 연결된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 두피디아, 나무위키 등을 참고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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