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에 대한 ‘탈시설’ 논쟁이 뜨겁다. ‘탈시설’은 이들을 지역사회로 이끌어 내어 함께 살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탈시설’ 주장을 들어보면 시설거주 장애인은 사회와 격리된 채 마치 ‘감옥’에서 지내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자유가 없고, 통제되는 생활은 물론 때로는 용납할 수 없는 인권유린이 자행되는 곳이 아닐까하고 착각할 수도 있다. 시설거주 장애인을 지역사회로 ‘탈시설’하도록 하는 것이야말로 장애인의 인권을 보장하고 사람다운 삶을 보장하는, 마치 유토피아를 이루는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대단한 착각이다. 주거약자 지역사회 통합 프로그램 역시 규모만 작을 뿐이지 또 다른 장애인 거주시설에 불과하다. 오히려 삶의 질이 더 나쁘게 바뀔 수도 있다.
지난 18일 오후 여의도에 있는 이룸센터 강당에서는 ‘탈시설 장애인’의 지역사회 성공적인 정착을 공유하는 행사가 열렸다. 사회복지법인 프리웰이 마련한 자리였다. 행사장에는 탈시설 장애인을 응원하는 쪽지로 벽면을 장식했다. 지역사회 통합 프로그램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탈시설 장애인을 인터뷰한 책자도 전시하고 있었다. 이날 행사는 ‘탈시설’ 장애인을 위한 지원주택 모델 성과를 공유하는 작은 축제의 장이었다.
그러나 건물 밖에서는 ‘탈시설’을 반대하는 시설거주장애인부모회 회원들이 무언의 피켓 시위를 벌였다.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인한 불미스러운 충돌이 빚어질까 염려한 듯 관할 경찰서 관계자들이 긴장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는 모습도 보였다. 왜 이 사람들은 ‘탈시설’을 반대할까? 먼저 밖에서 ‘탈시설’ 반대 입장을 들어보았다. 그리고 지하 강당 행사장으로 걸음을 옮겨 행사를 지켜봤다.
국민의힘 김예지 의원과 민주당 최혜영 의원이 영상으로 축하 메시지를 전했다. 정의당 장혜영 의원은 현장에 직접 나와서 축하인사를 했다. 이들은 장애인 당사자이거나 장애인 가족이다. 특히 장혜영 의원은 ‘탈시설’ 한 장애인 동생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탈시설’을 앞당기겠다고 했다. 장애인의 삶을 높이는 법안을 마련하고 각종 제도를 바꾸는데 앞장서겠다고 약속했다. 물론 타당하고 당연한 이야기였다. 정치인이기 때문에 행사를 주관하는 쪽의 입장을 두둔하는 ‘좋은 말’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의 메시지에서 한결같은 진실함이 묻어났다. 앞으로 이들 국회의원이 힘을 모으면 ‘탈시설’은 더욱 확고하게 진행될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탈시설’에 대한 찬성과 반대, 양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서로의 이야기가 모두 타당하다. 규모가 큰 거주시설에서 살았던 분의 경험담에서 시설의 부정적 측면을 느꼈다. 단체 생활 규정을 지켜야 하고 일정부분 통제가 있는 삶이었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 자신의 가정으로부터 분리된 상실감이나, 가족에 대한 배신감도 담겨 나왔다. 장애인이 된 것은 본인의 선택이나 의지와 상관없음에도 불구하고 일방적인 분리 단절의 고통을 강요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분들의 경우 스스로 생각하고 행동을 선택할 수 있다. 즉, 장애정도가 더 나은 경우다. 문제는 지능이 두세 살 정도의 장애정도가 심할 때 상황이 심각해진다. 어릴 때는 부모나 가족이 보살필 수 있지만, 나이가 들고 신체가 성장할수록 문제점이 두드러진다. 본인은 물론 가족 모두에게 부담스런 고통이 주어진다.
지적능력이 낮아 장애정도가 심각한 장애인은 본인의 의사결정 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질 수밖에 없다. 특히 돌발적인 ‘도전적 행동’ 앞에서는 부모 입장에서도 자녀를 돌보는 것이 힘겹다. 어찌 보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진 거주시설에서 생활하는 게 더 합리적이다. 장애인문제 전문가라면 이 점은 결코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도 장애정도가 심한 자녀를 양육하던 보호자가 자녀를 살해하고 본인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한 사건이 몇 차례나 발생했다. 그 삶이 오죽 답답했으면 자식을 죽이겠다는 생각을 했을까? 지적장애인 돌봄 책임을 부모나 가족에게 전가하는 것이 과연 옳을까? 어쩔 수 없이 자녀를 시설에 맡기고 늘 죄책감을 안고 살아가는 부모의 마음도 헤아려야 한다. 이들이야말로 우리사회에서 가장 힘없는 소수의 약자(弱者)다.
‘탈시설’ 주장은 옳고, 이를 반대하는 하는 것은 틀리다 주장하는 이분법이 더 큰 문제 아닐까? 차라리 더 좋은 거주시설을 만들고 합리적으로 운용하도록 국가가 나서는 게 타당하다.
국민의 대표성을 갖는 국회의원이라면 다양성을 인정하고 해결방법을 찾는 게 먼저다. 일방적인 주의주장에 편승하는 편협함을 버리는 게 옳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