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멜과 한글의 만남 그리고 나와의 인연"
"하멜과 한글의 만남 그리고 나와의 인연"
  • 조봉현
  • 승인 2019.10.07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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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50년 전 서양 선원들에게 비춰진 한글의 우수성
- 하멜이 남긴 기록의 가치 새롭게 조명해야
조봉현(국세청 사무관)
조봉현(국세청 사무관)

내 고향 전남 강진에는 하멜기념관이 있다. 하멜기념관은 우리나라를 서양에 최초로 알린 ‘하멜 보고서’의 저자 헨드릭 하멜을 기념하는 전시관이다. 한쪽 구석에는 내가 기증한 자료들도 전시되어 있다.

1650년 네덜란드를 출발한 하멜은 인도에서 2년 정도 근무를 하게 된다. 이후 1653년 타이완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로 가다가 태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고 살아남은 38명이 제주도에 표착하여 조선에서 13년간 억류생활을 했다.

처음에는 한양에서 급여를 받으며 조정의 보호 하에 2년 정도 살게 되었다. 귀국이 어렵게 되자 동료 2명이 조정의 뜻을 거역하는 어떤 사건을 일으키게 된다. 이에 놀란 조정에서는 멀리 전라병영성이 있는 강진으로 유배를 보내 병영성 옆에서 병마절도사의 감시 하에 살게 하였으며, 8년 후에는 다시 전라좌수영이 있는 여수 등으로 분산 배치하였다. 여수로 온 하멜은 3년이 지난 1666년에 동료 7명과 함께 여수에서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에 성공하였고, 다음 해에 고국인 네덜란드로 돌아갔다.

남부지방에는 지금도 병영이라는 지명을 쓰는 곳이 2곳이 있다. 한 곳은 전남 강진군 병영면이고, 다른 한 곳은 울산광역시 중구 병영동이다.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조선시대에 남부지방 서부지역 육군사령부는 지금의 강진 병영이었다. 동부지역 사령부는 경상좌도병영성이 있었던 울산시내 병영이었다. 남부지방에 5명의 병마절도사가 있었으며 이중 2명은 관찰사가 겸직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하멜을 기념하는 시설물이 3군데에 설치되어 있다. 하멜이 처음 도착한 제주도(서귀포시 안덕면)와 하멜이 가장 오랫동안 살았던 강진군 병영면, 그리고 마지막 유배지이자 탈출했던 여수시에 있다.

내가 처음으로 강진 하멜기념관을 방문했던 2011년 당시에는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물품이 그다지 눈길을 끌지 못했다. 하멜시대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생활용품의 모형과 하멜의 고향인 호르큼시의 현재 모습을 담은 사진이 전시되어 있었다. 또 하멜이 타고 왔을 것으로 상상되는 선박의 그림 등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우리는 학창시절 국사시간에 네덜란드의 하멜이라는 사람이 항해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로 표류해서 조선에서 살다가 돌아갔다고 배웠다. 그가 남긴 하멜표류기를 통해 조선을 처음으로 서양에 알렸다는 정도의 지식이었다. 하멜이 유명해진 것은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록물 때문이다.

그러나 전시관에 하멜에 관한 기록물은 거의 없었다. 이병도 박사가 영문판을 보고 번역해서 하멜표류기라고 제목을 붙였던 고서 한권이 유일한 기록물이었다.

사실 이병도 박사는 대표적인 식민사학자로 알려진 사람이 아닌가? 그 책 한권만이 유일하게 전시된 기록물이라는 것이 내 마음을 더욱 답답하게 하였다. 하멜표류기라고 이름을 붙였지만 표류기는 적합한 표현이 아니다. 하멜에게 있어서 표류는 항해 중 태풍을 만나 제주도에 도착한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하멜이 기록한 것은 제주도에 표착하여 조선에서 생활을 하다가 탈출할 때까지의 과정과 하멜의 본 조선의 인상을 장르별로 정리한 것이다. 그가 탄 배가 표류하는 과정은 전체의 1%도 안 되기 때문에 표류기는 적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없다.

표류기로 알려진 이유는 1934년도에 이병도 박사가 영문판을 보고 최초로 번역을 하면서 ‘하멜표류기’로 제목을 붙였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학자들이 펴낸 책들은 대부분 ‘하멜보고서’, ‘하멜일지’, ‘하멜의 조선에 관한 기록’ 등으로 발행되었다. 하지만, 잘못 꿰어진 첫 단추는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는데 아직까지도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 1669년 처음 출간된 책에서도 제목에 표류기라는 단어는 사용되지 않았다. 그때의 책 제목은 “스페르베르호가 켈파르트섬에서 실종된 1653년부터 일본 나가사키로 탈출한 1666년까지 그 배의 선원들이 겪었던 일과 조선왕국의 풍습 등에 관한 일지”로 되어 있다.

하멜은 선장이 아니라 항해일지를 기록하고 회계를 담당하는 직책으로 승선하였다. 사실 하멜보고서는 하멜이 직접 책으로 펴낸 것은 아니다. 하멜은 고국으로 돌아가서 회사에 오랫동안 실종되었던 경위를 밝히고 임금도 청구하기 위해 자신의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회사에서는 그 보고서에 상당한 가치가 담겨 있다고 평가하여 책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당시 대항해 시대에는 새로운 무역상대국을 찾는데 관심이 많았고, 시대상황과 맞물려 폭발적인 인기로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이 책은 독어판, 불어판, 영어판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내가 하멜에 관해서 남다른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하게 된 계기가 있다. 1995년도에 전남대학교 김태진 교수(오래 전에 작고)가 네덜란드어판 원전을 최초로 번역한 ‘하멜일지 그리고 조선국에 관한 기술’이라는 책(전남대학교 출판부 발간)에서 아주 인상적인 기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나는 그 책의 한 대목을 보고 마음을 빼앗겨버렸다.

일반적으로 하멜표류기라고 일컫는 하멜보고서는 크게 조선에서 자신의 생활을 연도별로 기술한 부분(하멜일지)과 조선의 지리와 문화 풍습 등을 기술한 부분(조선국에 관한 보고서)으로 나누어진다.

하멜보고서에는 조선의 문자에 대해서 소개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젊은 시절 한글운동에 열을 올렸던 나에게는 눈이 번쩍 뜨이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조선에서는) 문자를 쓰는 데 세 가지 방법이 있다. (첫째 것은 주로 책을 출판할 때 쓰이는 인쇄체 한자, 두 번째 것은 주로 관리들이 공문서를 작성할 때 쓰는 필기체 한자) 세 번째 것은 일반 백성들이 사용하는 문자인데, 이는 배우기가 매우 쉽고, 어떤 사물이든지 쓸 수 있다. 전에 결코 들어보지 못한 것도 표기할 수가 있는 쉽고 더 나은 문자표기 방법이다. 그들은 이 글씨들을 붓으로 매우 능숙하게 빨리 쓴다.

가난한 여자들은 학교에 가지는 못하지만 조선의 알파벳을 거의 모두 사용할 수 있다. 우리는 조선의 알파벳이 가장 훌륭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거의 단숨에 배울 수 있기 때문이다.

위 내용 중 앞부분은 하멜이 직접 쓴 기록이고, 뒷부분(가난한 여자들…)은 하멜의 일행이었던 에보큰이 당시 관계자 인터뷰를 통해서 증언한 기록이다.

현대에 와서 우리는 간혹 세계적인 언어학자들로부터 ‘한글의 우수성’에 대한 감탄사를 듣게 된다. 그러나 350년 전 서양의 일반 선원들에게 비춰진 한글의 우수성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조선시대 아무리 가난한 아녀자라고 하더라도(‘성별과 빈부의 차이가 없이’를 매우 잘 나타낸 표현) 문자를 거의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정말 지금도 자랑할 만한 우리의 문화역사가 아닐까?

나는 그 이후로 하멜연구를 시작했다. 전국의 유명한 헌책방을 모두 뒤져서 하멜에 관한 기록물을 수집했다. 지금은 구하기 어려운 희귀본도 권당 수 십 만원씩 주고 구입했다. 그리고 그렇게 구입한 15종의 자료들은 몇 년간 소장하다가 모두 강진에 있는 하멜기념관에 기증하였는데, 그 자료들이 하멜기념관 한편에 전시되어 있다.

하멜보고서 중 한글에 관한 우수성을 설명한 부분을 발췌하여 전시 패널로 제작하여 기념관에 게시한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기념관을 방문하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글의 우수성에 대하여 새로운 각도에서 자긍심과 감명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하멜기록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한다면 한국인에게 하멜표류기의 역사적 가치증대와 함께 강진의 하멜기념관은 더욱 의미가 있는 곳으로 기억될 것이라고 본다.

글 / 조봉현(국세청 사무관)

전남 강진 하멜기념관에 기증한 15종의 자료 (사진 조봉현 제공)
전남 강진 하멜기념관에 기증한 15종의 자료 (사진 조봉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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